"지금 할까?" 그녀가 먼저, 그리고 사라진 말
아내가 샤워를 끝내고 욕실문을 살짝 열었다. 머리를 수건으로 두르고 나온 얼굴이 실눈을 떴을 때처럼 빨갰다.
오늘 밤 하자.
그 한 줄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심장 한복판을 찍었다.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벌써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은 지 수개월. 갓난아이는 이제 겨우 한 살. 천장이 낮아진 침실, 늘 젖은 젖꼭지 냄새, 침대 끝에 쌓인 기저귀 더미. 그런 곳에서 갑자기 "오늘 밤"이란 말이 튀어나오니, 내 몸은 기막히게도 가슴께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밤이 다 찼을 때, 아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운 척, 숨소리가 고르지 않은 척. 뒤척이다 말했다.
내가 뭐 그랬지?
그건 끝이었다. 약속은 눈 깜짝할 사이 지워졌다. 나는 불이 꺼진 침대에서 석양이 드리운 듯한 붉은 여운 속에 홀로 남았다. 아내의 잊음 속에서 내 욕망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살아 있었다. 잊은 건 그녀였지만, 잊히지 않은 건 나였다.
욕망에 남은 반칙 같은 흔적
그 말 한 마디가 지닌 무게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아내가 던진 것은, 그날따라 불쑥 돌아온 ‘여자’의 목소리였다. 육아로 눌러붙은 반무늬 가운 대신, 뒤집어진 홍학색 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붉은 수건. 젖꼭지에서 떨어진 우유 냄새를 가리려 바른 바닐라 바디워터. 그 모든 잔상 위에, 그녀는 말했다.
오늘 밤 하자.
문제는, 그녀는 말했다가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육아라는 전쟁터에서 여자는 하루를 버티고 나니, 섹스는 뇌의 가장 먼 부품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 내 몸은 말했다가도 그 말을 지우지 못한다. 그 한 줄이 발화된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녀 안에 들어가 있다. 아내가 잊은 뒤에도, 나는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건 단순한 성욕이 아니다. 이건 ‘선택받았다’는 착각이다. 그녀가 먼저 키를 돌렸다고 믿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거절당할 가능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아내가 잊었을 때, 나는 배신감에 가까운 아쉬움을 느낀다. 너는 내게 열쇠를 건넸다가, 나를 방 밖에 두고 잠들었다.
실제 같은 두 번의 밤
첫 번째 밤: 민수(35)와 하린(33)
민수는 서점에서 파트타임을 하며 아이를 돌본다. 하린은 대기업 지점장. 둘은 3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호텔 스테이를 했다. 하린이 먼저 샤워를 마치고, 잠옷 대신 짙은 남색 셔츠 하나만 걸친 채 민수를 불렀다.
오늘은 네가 먼저, 민수야.
민수는 샤워를 급히 끝내고 나왔다. 하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숨소리가 너무 고르지 않았다. 민수가 다가가려 할 때, 하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오늘 너무 피곤해. 미안.
민수는 그 한마디에 얼었다. 아까 전까지 환히 웃던 아내가, 무슨 스위치 하나로 꺼져버렸다. 민수는 조용히 옆에 누웠다. 벌건 눈을 떴다. 아내는 곧 잠들었지만, 민수는 아침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날 하린은 아침에 깨어나며,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민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두 번째 밤: 영재(39)와 수진(37)
영재와 수진은 7년차 부부. 그들은 매일 밤 아이와 함께 잤다. 수진은 아이 방에 들러붙은 침대 하나를 더 두었다. 하지만 그날 밤, 수진이 아이를 재우고 돌아오며 영재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우리끼리만 잘까?
영재는 잠시 멍했다. 결혼 후 처음 듣는 제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키운 지 4년 만의 첫 번째 밤. 하지만 아이가 갑자기 울었다. 수진은 재빨리 일어났다.
금방 올게.
수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새벽 내내 토했다. 수진은 아이 옆에 붙어 잤다. 영재는 혼자 누워 있었다. 아침에 수진이 들어오며 말했다.
어젯밤에 뭐 했더라? 아, 그래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 안 나.
영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잊었다. 하지만 영재는 잊을 수 없었다. 그를 불러놓고, 혼자 남겨둔 그녀의 말이 목끝에서 잊히지 않았다.
금기의 뒤틀린 쾌감
우리는 왜 이런 상황에 끌릴까? 왜 한쪽이 잊은 뒤에도, 다른 한쪽은 잊히지 못할까?
이건 약간의 학대와 닮았다. 누군가 내게 열쇠를 건네고, 나를 방에 가둔 뒤 문을 잠근다. 내가 들어가고 싶었던 곳에서, 내가 머물고 싶었던 순간에서, 나는 배제된다. 그렇게 잊히는 순간, 나는 내 욕망의 유령이 된다.
이 금기는 독특하다. 억울함, 서글픔, 욕정, 다 분노에 버금가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잊히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그 말 속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 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건 ‘상실된 욕망’이 만드는 착시다. 욕망은 목표 지향적이다. 하지만 목표가 사라진 순간, 욕망은 고립된다. 고립된 욕망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성적 쾌감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상대’를 좇게 된다. 억울함보다 더한 쾌감이다.
당신도 지금 누군가를 방 밖에 두고 잠들었는가
문득 떠올려본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약속을 건넸다가 잊지 않았는가. 아니면 당신도 누군가의 약속을 받아놓고, 혼자 잠들었는가. 그 순간 당신은 누군가를 방 밖에 두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직도 방 문 앞에 서 있다.
잊은 건 당신이지만, 끝나지 않은 건 나니까.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든 건 당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