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심쿵했더라고요"
라운지바에서 반짝이는 은박 카드로 칵테일을 저으던 지환은, 갑자기 폰을 꺼내 BTS 무대 영상을 보여줬다. 손에 든 잔이 아직 미끄러질 듯 말 듯 흔들릴 때였다.
너무 섹시해서... 진짜 반했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가 내미는 화면 위로 여자 아이돌의 다리가 찢어지듯 올라갔다. 레깅스라기엔 시스루에 가까운 핑크 스판. 카메라가 슬로우로 그녀의 허벅지를 스캔했다. 지환은 콧노래를 흘리며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이 아니라 그녀의 허벅지를 삼킨 듯한 느낌이 나를 토하게 만들었다.
조용히 열리는 뱀장어 같은 시선
왜 하필 지금이야.
왜 내 앞에서.
여자 가수에게 심쿵한다는 말에는 어떤 배신이 숨어 있다. 그건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너도 모르는 사이 내가 늘 감춰온 욕망의 얼굴을 꺼내 드러내는 장면. 그가 말하는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 뒤편에 내 몸을 헤아리는 척도 하나를 발견한다. 36-24-35 같은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가수와 닮았냐는 잣대.
그리고 그 잣대는 나를 늘 부족하게 만든다. 내가 아무리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목소리를 가수처럼 낮추며, 립스틱 색을 맞춰 발라도, 나는 결코 그녀의 무대 위 3분을 살 수 없다. 지환은 말한다.
그녀는 진짜 무대 위에서 빛나잖아.
너는... 너도 예쁜데, *좀 더* 섹시하면 딱일 것 같아.
좀 더. 두 글자는 수면 위로 살금살금 올라온 상어 지느러미처럼 내 안을 할퀸다.
민주’s story: 팬미팅에서 돌아온 남자
민주는 28일 연애 끝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마지막 선물을 꺼내봤다. 블랙박스에 담긴 핸드폰 액정이 흠집 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채팅방엔 그날 팬미팅에서 찍은 아이돌 사진이 213장이 넘게 쌓여 있었다. 파일명은 날짜_번호_말풍선수정본.
오늘 진짜 눈 맞았다.
눈이 부딪쳤을 때 심장이 터질 뻔했어
화면 속 여자 아이돌은 전광판 너머로 손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그리고 닿지 않아서 더 아프도록.
민주는 그날 밤, 그의 몸이 뱅뱅 돌며 사진을 찍는 동안, 자신의 손목을 꼭 잡고 있던 손을 떠올렸다. 그의 손은 여자 가수의 손바닥에 찍힌 하트를 겹쳐 찍느라 바빴다. 그리고는 말했다.
잠깐만, 니가 피곤해 보여서
나중에 민주랑 똑같은 하트 사진 찍자
그때 민주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의 이미지 속에만 존재하는 거라고. 213장 속엔 민주는 단 한 장도 없었다.
지수’s story: 음원 차트 앞에서
지수는 남자친구와 함께 차에서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여자 가수의 신곡이 흘러나왔다. 그는 볼륨을 꽉 올리더니 말했다.
요즘 이 음원 차트 1위 아는 사람?
완전 물이 올랐어 진짜
그는 핸들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가 여자 가수의 머리카락처럼 흔들렸다.
너도 한번 들어봐
너랑 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지수는 귀를 막았다. 남자친구의 목소리는 여자 가수의 보컬과 겹쳐졌다. 그는 말했다.
아니, 니가 똑같이 불러줬음 좋겠어
*한 번만.*
왜 우리는 이 욕망에 끌리는가
우리는 사실 대체재를 찾고 있었다. 여자 가수는 결코 만질 수 없는, 그러나 영원히 젊고, 영원히 화려하고, 영원히 나를 거절하지 않을 존재. 그녀는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며,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이 여자 가수에게 심쿵한다고 고백할 때,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너무 실재해서 불안해. 그녀처럼 반짝이는 허구가 되어줘.
그래서 우리는 역겨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심쿵’이라는 단어 뒤에는, 우리를 끊임없이 현실로 밀어내는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무대 불빛이 꺼지면
당신도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혹은 스스로 그런 말을 꺼낸 적도. 그때 우리는 무엇을 원했을까. 가수의 노래를, 아니면 그녀를 통해 우리를 채우는 공허를?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군가에게 심쿵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