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18살로 보인다는 말, 왜 그게 발가벗겼던 순간이었을까

술집에서 들은 ‘18살로 보인다’는 칭찬이 왜 칼날이 되어 36년의 삶을 지워버렸는지. 나이를 부정하는 말 속에 숨겨진 권력과 욕망의 어두운 계약을 파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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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로 보인다는 말, 왜 그게 발가벗겼던 순간이었을까

36살 김유진은 그날도 똑같은 검은 정장을 입었다. 술집 테이블 맞은편, 스무 살은 넘은 듯싶은 남자가 한 모금 남은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언니, 진짜 스무 살은 돼야 보이는 거 아니에요?"

순간 어깨가 움찔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이런 말을 들으면 꼭 웃어야 할까. 그녀는 시선을 낮춰 립스틱이 묻은 잔을 돌렸다. 괜찮은 말인데도 가슴 한쪽이 울렁였다. 그렇게 시작된 밤이었다.


꿈꾸던 나이가 남긴 홀

처음엔 기쁠 줄 알았다. 가장 듣고 싶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말이 가장 먼저 꺼낸 사람을 떠올렸다. 29살, 결혼 두 달 전이던 밤, 신랑 강민수가 속삭였다.

"야, 너 진짜 고딩 같아. 나랑 있으면 범죄자 된 것 같잖아."

그때는 설렜다. 지금은 벌써 7년째다. 강민수는 그 말을 한 뒤로 누가 먼저 꺼냈는지도 기억 못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유진은 잊지 못했다. 그 말이 우리 사이에 첫 균열이었다.


숫자 속 갇힌 욕망

"나이를 부정한다"는 말은 결국 "그 나이의 삶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36년은 한 방울도 없던 셈이 된다.

28세에 창업해서 망한 회사. 32세에 끝난 임신 중절. 어젯밤까지 복용하던 호르몬제.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한꺼번에 뒤집혔다.

"18세로 보인다" = "그 상처들은 너의 나이에 맞지 않아서」

결국 그 말은 그녀의 전부를 지워버리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떤 몸이어야, 어떤 웃음이어야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선배의 얼굴

"나도 그 말 똑같이 들었어."

주영미는 42세, 같은 업계 선배였다. 지난달 회식 자리에서 신입 남직원이 그녀에게 한 말이다.

진짜 스물다섯은 돼야 할 것 같아요

영미는 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러고선 유진에게 물었다.

"너도 그 말 들으면 뭔가 찜찜하지 않아?"

영미는 그날 밤 휴대폰 갤러리를 뒤졌다. 20대 사진들. 얼굴은 지금이 더 나은데 그때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건 내가 원래 어른이 아니었던 시절이라서였나.


숨겨진 계약

"젊어 보인다」는 말은 남몰래 체결된 계약다. 말하는 이는 자신이 더 어리다는 위안을 삼고, 듣는 이는 자신이 여전히 '선택'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도둑질한다. 말하는 순간, 듣는 이의 나이는 36에서 18로 줄어들고, 말하는 이는 28에서 40이 된다. 그럼으로써 양쪽은 동시에 권력을 되찾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다 거짓이다. 18세는 이미 지나간 숫자이고, 36세는 피할 수 없는 현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숫자를 조용히 지우기로 약속한다. 그 누구도 이 계약서를 찢지 못하게.


뒤집는 순간

유진은 그날 새벽, 거울 앞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목덜미 아래로 내려앉은 주름이 거칠게 손가락에 걸렸다. 이게 내 36년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질렀다. 더 이상 숫자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18살로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이 몸으로 충분히 보이고 싶었다.


묻는다

당신은 몇 살로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짜로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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