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가 날 조금씩 망가뜨리는데, 왜 난 손을 놓지 못했을까

알면서도 끌리는, 남자가 내게 남긴 침묵과 금기의 자국. 나는 왜 떠나지 않았는가.

집착자기상실금기의 끌림파괴적 관계거부불능욕망

"니가 망가지는 게 내가 제일 설레"

셔츠 단추를 채우다가 멈칫했다. 거울 속 내가 낯설어서. 눈가가 파래 있고, 목덜미엔 지난밤 그가 세게 물은 자국이 아직 진했다. 손에 들린 그의 지갑—우연히 집어 든 건데—열어보니 내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니, 예전의 나. 웃고 있는, 맑고 뻔뻔했던 나.

  • 니가 뭐 하고 다니는지 아냐, 하고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 …뭐?
  • 너, 테니스 치던 애 맞지? 이렇게 된 거 후회돼?

그는 웃었다. 하지만 눈빛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찰나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사람, 나를 망치는 걸 즐기고 있구나.’ 그걸 깨달았을 때도, 발걸음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욕망은 언제나 파국을 향해 걸어간다

사람은 어째서 자기를 해치는 관계에 발을 담그면서도 손을 놓지 못할까.

‘그의 눈빛이 나를 녹였다’ 혹은 ‘그의 손끝이 나를 태웠다’—이런 말들은 화려한 수사일 뿐이다. 사실은 더 지독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또 깨지면 어떻게 되지?’**라는 불안감보다도 **‘이게 끝나면 나는 누구지?’**라는 공포에 먼저 떨고 있었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

  • 너, 재능 없어. 단지 예뻐서 주목받는 거야.
  • 넌 약해. 그래서 내가 널 지켜줘야 해.

거짓말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그만큼 단단해지면, 그 말들이 힘을 잃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 번 들은 말은 피부에, 뼈에, DNA에 새겨졌다. 점점 더 작아지는 나. 키 작은 나, 목소리 작은 나, 욕망도 점점 작게 움츠러드는 나.

그런데도 떠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게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내가 여태까지 뭘 견뎌 온 거지?’


사례 1 : 지은의 침묵은 91일째 계속된다

지은은 28살, 광고 회사 AE. 지난해 5월, 대표 이사인 ‘현수’에게 끌렸다. 그는 42살, 유부남.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현수가 말했다.

니 손목이 너무 가늘어서, 한 번 부러뜨리고 싶어.

지은은 웃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사내에서 지은의 프로젝트는 하나씩 빼앗겼다. 그때마다 현수는 ‘제발 화내지 마, 니가 더 좋은 걸 할 거야’라고 촉촉이 달랬다. 지은은 눈치를 봤다. 회사 사람들이 수굣거리는 소리, 뒤에서 찌르는 시선.

91일째. 지은은 더 이상 직접 고객 미팅에 나가지 못한다. 그녀의 자리는 사내 가장 구석진 곳.

  • 너무 힘들다고, 끝내자, 하고 퇴근길에 말했다.
  • 끝내면 너 회사 생활도 끝나, 라고 돌아온 답.

그날 이후, 지은은 카카오톡 마지막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있다. “하루만 보고 싶어”라는 현수의 말이 계속 떠오른다. ‘그가 나를 망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걸까?’


사례 2 : 수진의 거울은 3cm씩 작아진다

수진은 31살, 트레이너. 남자친구 ‘도윤’은 동네 헬스장 강사. 처음엔 둘 다 몸짱이라 부러움받는 커플이었다.

도윤은 수진의 식단표를 관리했다. 하루 900kcal, 탄수화물 0g. 수진이 반항하면 도윤은 말했다.

  • 너 살 찌면 사랑이 식어. 난 솔직한 거야.

수진은 처음엔 다이어트가 목표였다. 그러나 5kg, 7kg, 10kg 빠질수록 도윤은 수진을 더 자주 침묵시켰다.

너무 느려. 
너는 원래 기초체력이 모자라.
너 없이는 나도 힘들어.

수진은 매일 아침 몸무계를 재고, 스마트폰에 적었다. 숫자가 줄 때마다 도윤이 주는 ‘좋아요’ 하트가 뜨는 게 기뻤다.

그러나 어느 날, 거울 속 얼굴이 흐려졌다. 눈이 파래 있고,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수진은 그 순간 깨달았다.

‘그가 원하는 건 내 몸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수진은 도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몸으로는 다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왜 우리는 금기의 문을 밀어 열고 싶어 하는가

정신분석학자 발라그는 "파괴적 대상 투사"라는 말을 썼다. 한마디로, 상대에게 자신의 ‘나쁜 부분’을 투사하고, 그것을 지워달라고 요구하는 심리.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너는 전혀 특별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성인이 되어 그 말을 반복적으로 듣고 싶어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면의 오래된 상처가 현재의 상처로 바뀌고,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치유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

즉, 우리는 상대가 우리를 망치기를 은밀히 바란다.

왜냐하면 그 피해감각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결국 안전감의 다른 이름이니까.


마지막 질문

그가 널 망가뜨릴 때마다 넌 얼마나 가까스로 붙잡았니? 그 끝에서 너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네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본 게 아니었니?

지금 이 순간, 네가 떠날 수 없다면—정말로—그건 그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네 안에 아직도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말하는 목소리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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