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터치 한 번에 내 짝사랑이 연인이 되는 순간, 왜 난 너를 스와이프 못하니

1년째 지켜본 그 계정. 오른쪽으로 미는 손가락 한 방울이 현실을 부를까 두려워 떨고 있다. 당신도 아직 스와이프하지 못한 누군가가 있나요?

dating-appscrushtinderunrequited-lovefantasy

그날도 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준혁, 0.8km”
화면 꺼진 휴대폰에 비친 내 얼굴이 움찔했다. 1년 3개월째 ‘X’ 버튼만 누르다 끄는 습관. 오늘도 그의 프로필을 지웠다 다시 살렸다, 스토커처럼.

12시 47분, 막차를 놓친 지하철 역사. 술 취한 청년이 내 어깨를 스친다. 문득 준혁이 지난 봄 내가 올린 사진에 ‘좋아요’ 눌렀던 일이 떠올라, 핫팩 하나를 꺼내 쥐었다. 손이 데는 줄 알면서도 꽉 쥔다.

‘지금 당장 오른쪽으로 밀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누가 먼저 파고들지

오른쪽 스와이프는 사실 마지막 경고장이다. 매치가 되는 순간 ‘좋아요’가 아니라 ‘나도 너 좋아해’라는 말이 돼버린다. 짝사랑은 지금까지 괜찮았던 거짓을, 단 한 번의 드래그로 뒤엎는다.

준혁은 회사 옆 카페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1년 전, 동아리 후배가 "형이 여기서 봤다"며 휴대폰을 내밀 때부터. 그때도 역시나 ‘X’였다. 그날 밤 나는 3시간 동안 그의 프로필을 스크린샷 찍고, 매주 금요일마다 같은 시간에 그 카페 앞을 서성였다.

‘혹시나 단골일까, 혹시나 나를 알아볼까.’


지은, 29세

광고대행사 AE 지은은 틴더에서 준혁과 매치된 건 11개월 전이었다. 그녀는 한창 기획서에 치이던 와중, 잠깐 재미로 깔았던 앱에서 ‘우연히’ 스크롤을 멈췄다.

프로필 첫 줄. "나는 지금 당신이 어떤 옷 입고 있는지 궁금해." 그녀는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았다. 카드 뒤집기. 오른쪽. 매치. 다음 날, 지은은 5년 만에 단발로 잘랐다. 단정한 숏컷이 그의 취향일 것 같았다.

준혁은 메시지를 안 읽었다. 읽힌 지 3주째. 그녀는 매일 밤 ‘혹시나’라는 이름으로 지하철 2호선을 한 바퀴 돌았다. 그의 회사가 있는 역에서 내린 적은 없었다.


민서, 26세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민서는 준혁을 ‘틴더 귀신’이라 부른다. 6개월째 준혁의 프로필이 뜰 때마다 스크린샷을 찍어 ‘귀신_001.jpg’로 저장한다. 300장이 넘었다.

지난주, 드디어 용기를 냈다. 오른쪽으로. 두 시간 뒤, 알림. "민서님과 매치되었어요!" 그녀는 손이 떨려 한 손으로는 연필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잡았다. 첫 메시지는 17번 지웠다가 다시 썼다. 보낸 지 30분 지났을 때, 준혁이 좋아요를 취소했다. 사라진 매치.

‘내가 너를 찍은 사진 300장보다, 네가 날 스쳐 지나간 순간이 더 선명해.’


금기의 맛

우리는 왜 미뤄두는 걸까. 준혁이 나에게 매치된다는 상상은, 사실 내가 그에게 거절당한다는 상상보다 훨씬 달콤하다. 짝사랑의 본질은 거울 속에 있다. 내가 투사한 상대는 아직 말이 없다. 말이 생기면 환상이 깨진다.

틴더는 몰래카메라처럼 움직인다. 누군가를 ‘좋아요’ 누르는 순간, 나는 그의 타임라인에 잠입한다. 누가 내 사진을 얼마나 오래 봤는지, 어떤 문장으로 나를 저장했는지. 이런 투명성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손가락 한 번에 모든 사연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그렇게 투명해지지 못한 밤들이 쌓인다. 아직도 준혁은 0.8km 떨어진 어딘가에 있고, 지하철 역사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환상은 여전히 거울 속에 살아 있고, 우리는 아직 손끝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죽인다.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