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만 해도 몰랐지, 내가 걸어가는 길 하나하나가 그에겐 범죄 현장이었다는 걸.”
미코노스의 좁은 골목. 흰 담장 위로 장미가 넘실대는 오후, 나는 하늘색 린넨 원피스에 누드톤 샌들을 끌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골을 스쳤고,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한 손으로 가느다란 어깨끈을 살짝 올렸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 누군가의 숨소리. 그리고 준혁이 다가와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낯선 놈들 투성이라고.”
시선이 닿는 순간의 환희와 공포
그날 밤, 준혁은 유난히 야위어 있었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가 문득 물었다.
나도 모르게 화장실 갈 때마다 네가 어디 있는지 찾게 돼. 네가 남자들이랑 웃고 있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그게 질투라기보단… 낯선 남자들이 너를 알아보는 게 두려운 거야.
여행지에서의 나는 평소보다 화려했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에 해변에서 태양을 머금은 피부. 누군가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내 안에선 묘한 전율이 일었다. 누가 나를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가 조금씩 내 편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준혁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위험신호였다. 하늘거리는 원피스 자락, 흘린 미소 하나까지도—다른 남자들이 보고 싶어 할 장면이었다.
너를 원하는 시선, 나를 파괴하는 시선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도착한 곳이 누구에게나 허물어진 경계라는 걸. 내가 낯선 거리에서 홀로 걷는 공기가 얼마나 끌리는지. 그래서 준혁은 더욱 광기 어린 방식으로 날 지켰다.
화려한 하늘색 원피스는 벗어두자. 저녁 식사는 발코니에서만 하자. 사진은 내가 찍어줄게, 다른 사람 손에 카메라 넘기지 말고.
그는 내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마치 내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수록 위험이 줄어든다고 믿는 듯했다.
두 번째 여행지, 산토리니
“미아 씨, 와인 한 잔 어떠세요?”
풀장 옆 바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스페인 억양 섞인 영어.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머리.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준혁이 내 뒤에서 나타났다. 손에 들린 두 잔의 모히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척 고개를 숙였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스페인 남자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나는 준혁의 손목을 잡았다.
“미쳤어?”
“미쳤어야겠지. 네가 다른 남자랑 눈 맞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너를 끌어안고 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날 밤, 침대 위에서
산토리니의 하얀 침대는 우리의 전쟁터였다. 준혁은 내 팔을 위로 들어 올려 침대대에 고정했다. 그의 숨소리는 뜨거웠다.
들려? 네가 저 남자한테 웃어줬을 때, 나는 여기서 네가 어떤 소리 내는지 상상했어. 다른 남자들이 그걸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내 귀를 살살 물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소름끼치게. 나는 그의 말에 몸서리쳤지만, 동시에 어딘가로 스며드는 환희도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여기서 네가 가장 아름다워 보여. 어둠 속에서만, 내 눈에만.
우리는 왜 이 기묘한 금기를 사랑하는가
심리학자 로버트 그린은 말한다. 집착은 사랑의 어두운 형제다. 준혁의 두려움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선다. 그건 내가 다른 이의 시선에 서서히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자, 동시에 그 불안을 즐기는 병적인 쾌감이다.
여행지는 우리를 익명의 존재로 만들어준다. 누구도 우리의 실제 이름을 모르고, 우리를 ‘연인’ 혹은 ‘낯선 여자’로만 본다. 그래서 준혁은 더욱 미친다. 저 남자들이 너를 ‘갖고 싶어’ 하는 순간—바로 그때, 그는 자신이 내 전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밤, 그가 한 말
비행기 안에서 준혁이 속삭였다.
“집에 가면 다시 괜찮아질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마도 우리는 이미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금기의 쾌감이, 이제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따라다닐 테니까.
당신도 누군가에게 ‘오직 나만이 너를 알아본다’는 말을 들으며, 그 집착의 온도를 은밀히 즐겨본 적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