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보낸 첫 문자
[오늘 늦을 것 같아. 미아가 너무 우니까 그냥 자고 갈게.]
문장 끝에 붙은 말줄임표 하나가 차가운 예감을 남겼다. 미아는 결혼 6년 차 부부인 우리가 함께 아는 대학 후배. 그녀는 요즘 이혼 소송 중이라며 술을 마시고 울기 일쑤였다.
밤새 불이 꺼진 거실에서 나는 아내의 잠옷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친구 집에서 자는 게 왜 이렇게 불안하지?’
냉장고에 남겨진 한잔의 우유
아침 일곱 시, 현관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 아내는 내가 깨지 않길 바랐는지 조심스레 발을 뗐다. 부엌에서 유리잔과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갑자기 서걱거리는 플라스틱 소리. 나 포장된 치즈를 뜯는 소리였다.
눈을 감고 귀를 세웠다. 그녀는 유리잔에 우유를 따르고, 한 모금 마신 뒤 싱크대에 잔을 내려놓았다. 물 소리는 없었다. 불쑥, 치즈 봉지를 접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알았다.
‘그녀는 결국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의 끝은 설거지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두 번째 부부 이야기: 현우와 수진
현우는 익명 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아내가 친구 집에서 자는 게 이제 익숙하다. 처음엔 ‘회식 뒷풀이’였고, 다음엔 ‘원룸 청소’였다. 어젯밤엔 ‘갑자기 눈이 내려서 택시가 잡히지 않았대’.
수진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그녀가 샤워하며 부르는 노래도, 새로 산 립스틱 색깔도, 손등에 그려진 작은 문신도 전부 낯설다.
그런데 나는 ‘왜’를 묻지 못한다. 물으면 대답은 뻔하니까. “그냥 좀 지치니까.”
거짓말의 미학
우리는 친구 집 살이라는 ‘거짓말’을 선택한다. 이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이미 끝난 관계를 끝까지 지켜주는 예의다. 배우자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끝내주는 배려.
수진의 속눈썹이 뭉개지는 걸 본 건 지난주였다. 그녀는 새벽 두 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우는 침대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문밖을 들여다봤다. 수진은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아직은 끝나지 않았어.’
잠긴 방문 뒤의 침묵
결혼 생활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느냐. 또 하나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지 않느냐.
아내는 두 번째를 택했다. 그녀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미아의 집에서 눈 오는 밤을 보냈다. 내가 잠든 사이, 그녀는 미아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취해서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을 뱉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그녀는 다시 조용한 아내로 돌아온다. 냉장고 문을 닫고, 설거지를 하지 않은 채 출근한다. 그리고 나는 묻지 못한다. 왜, 언제, 얼마나 더.
독백
친구 집 살이는 사실상의 이별이다. 우리는 서로를 버리지 못해, 서서히 사라지는 방법을 택한다. 침묵은 눈처럼 쌓이고, 어느 순간 문은 닫혀 있다.
마지막 질문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 잠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