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래더미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유리벽 너머로 본 그의 시선이었다. 한참 뒤에서 남편이 킥보드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었다. ‘오늘만.’ 스마트워치에 찍힌 17분. 빨간 초록 불이 바뀌는 신호등보다 빨랐다.
그가 사라진 17분
왜 아이의 유치원 옆, 누가 봐도 아는 얼굴이 오고가는 동네였을까. 도시락 상자를 싸면서도 생각했다. ‘버스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는 핑계가 문 앞에서 써먹히지 못할 순간이었다.
안경 너머로 그가 웃었다. 아이들이 오후 낮잠 자는 40분도 괜찮았을 텐데.
남편은 주말마다 아이와 공을 찬다. ‘아빠의 특훈 시간’이라고 부르는, 육아 분담표에 적혀 있는 문장. 그녀는 형광펜으로 그 문장을 밑줄 치고 아래에다 작게 적었다. ‘e-mail. 11:30. playground café.’
욕망의 간극
‘나는 아이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있나?’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이름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불리고 싶은 욕망. 남편이 “와이프, 물 좀”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모유수유 14개월째인 젖꼭지가 아닌 제 젖꼭지를 다시 찾고 싶었다.
피어싱이라도 하나 할까. 아이가 잠든 새벽 2시, 남편의 코 고는 소리 사이로 검색했다. ‘맞은편’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대문이 빤히 보이는 발코니에서 찍은 것. 실수였을까. 아니면 초대였을까.
실제 같은 이야기 1: 지민의 4월
지민, 32세, 아들 둘. 둘째가 다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주말마다 남편은 아이와 자전거를 탔고, 지민은 ‘몸이 아프다’며 집에 남았다. 사실은 맞은편 편의점 앞에서 ‘K’를 기다렸다. K는 대학 동아리 선배였다.
- 첫 주: 스카치 한 모금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그녀가, 이번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둘째 주: K가 아이 손에 쥐어준 딸기 젤리를 받으며 “아가씨 남편이랑 헷갈릴 뻔했네” 라고 웃었다.
- 셋째 주: 카페 화장실에서 3분 만에 키스. 붉은 립스틱이 그의 옷깃에 묻었다. 지민은 휴지로 지웠지만,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이 “오늘 딸기 젤리 먹었나 봐, 아이가 계속 달라고 난리”라고 말했다. 지민은 죄책감 대신 ‘내 입맛이 아이에게 전해졌구나’ 라는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다.
실제 같은 이야기 2: 혜진의 7월
혜진, 35세, 딸 하나. 한낮 기온 33도, 그늘 아래서도 땀이 비 오듯 했다. 남편은 ‘에어컨 나오는 분수 광장’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문자 한 통.
남편: 물총 샀음 ㅋㅋ 잠깐만 더 놀다가 갈게
혜진: 좋아! 천천히 와
사실 혜진은 분수 광장과 떨어진, 그늘진 골목 뒷문에 있었다. ‘J’, 아이의 유치원 반 친구 아빠가 손에 쥐어준 미니 선풍기에서 바람이 나왔다.
J: 시원해?
혜진: 선풍기보다 당신 눈이 시원해
손가락이 손가락을 스쳤다. 손등 위로 번진 땀방울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아이들이 물총싸움을 하는 22분 동안, 그들은 첫키스를 나눴다. 죄책감 따위는, 한여름 땀처럼 금세 증발했다.
왜 우리는 금기 너머를 걷는가
우리는 ‘아내’ 혹은 ‘엄마’가 되면서, 한 번도 아닌 척 살아온 여자로 살고 있다. 그 누가 말했던가. “결혼은 가장 긴 연기.”
- 아침 7시: 아이가 눈을 뜨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욕망
- 점심 12시: 도시락 통에 말린 과일과 함께 묻히는 나의 입맛
- 저녁 9시: 아이가 잠든 뒤, 남편이 노트북을 켜는 소리
그 틈, 17분 혹은 22분은 우리가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는 유일한 확률. 그래서일까. 누군가 “도망가자”라고 속삭이면, 우리는 아이의 이름 대신 제 이름을 연다. 훔친 시간이기에 더 달콤했다.
마지막 질문
지금 이 순간, 아이가 놀이터에서 돌아오기 전 3분. 당신은 그 3분 동안 누구의 손을 떠올리고 있는가. 그 손이 남편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손이 당신의 욕망이 꼬리를 흔드는 시작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