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지하주차장 불빛 아래로 서늘한 손가락이 슬며시 들어왔다.
손바닥이 닿는 순간, 머릿속 스위치가 내려앉았다.
전날까지 쌓인 숙제, 눈앞에 닥친 보고서, 그리고 한참을 지켜본 민지의 퇴근길까지.
모두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날 이후, 9층 문서고 뒤쪽 복도는 우리만의 검은 해변 같았다. 그녀의 숨소리는 파도, 내 손끝은 잔해.
두 번째 숨
왜 오늘은 더 뜨거울까.
전등 하나만 남긴 사무실. 모니터 불빛 아래, 민지의 이름이 떠 있던 메일이 눈앞에 겹쳤다.
‘업무 범위 재조정, 3일 내 최종안 제출’
그 한 줄이 목끝을 죄었다. 숨이 막히자, 닫힌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도 돼?”
“…빨리.”
사내 CCTV가 닿지 않는 사각, 복사용 캐비닛 뒤. 그녀는 이미 스웨터 아래로 손을 넣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숨을 끌어당겼다. 불법이란 단어가 두 사람 사이를 흔들었지만, 스트레스가 더 강했다.
세 번째 숨
‘나는 어떻게 되버린 걸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늦은 야근에 지친 평범한 팀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복도 끝에서 동료의 허리를 붙잡고 떨고 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욕망의 해부
스트레스는 몸을 둘로 쪼개 버렸다. 하나는 회의실 너머로 조용히 무너지는 평범한 나. 다른 하나는, 문 뒤에서 민지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나.
불안은 열을 내며 늘어났다. 숨막히는 업무, 팀원들의 눈초리, 상사의 카톡. 그리고 퇴근길 내내 떠오르는 회의실 복사기 위에서 허겁지겁 벗던 민지의 블라우스.
우리는 서로를 약속이 아니라 도피처로 삼았다. 길이 아니라, 끝.
실제 같은 이야기 1: 아이유(32세, 광고회사 AE)
아이유는 스물여덟이던 해, 클라이언트 3곳의 리브랜딩을 떠안았다. 하루는 18시간. 잠은 회의실 의자에 해딩.
“그만 좀 쉬어.”
“쉬면 밀리니까.”
딱딱한 대사 끝에 숨이 끊어질 것 같던 어느 밤, 파트너 디자이너 ‘재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눈을 감아도 돼. 이건 업무 아니니까.”
그날 이후, 아이유는 색감 대신 재현의 숨결이 떠오르는 각도를 기억했다. 회의실 희미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은 서로의 출혈점을 빠르게 핥았다. 아이유는 결국 승진했지만, 재현은 그만두었다. 그녀는 새 팀원에게서도 그 냄새를 맡았지만, 남은 건 테이블 위 문서뿐이었다.
실제 같은 이야기 2: 도윤(29세, 게임사 기획자)
도윤은 3년째 같은 프로젝트에 묶여 있었다. 사내 게시판 ‘연차 사용 권장’ 공지는 그의 위장메일이었다.
“야, 너 오늘도 남는 거야?”
“…뭐, 남는다고 할까?”
테스트실 빈 모니터방. 동료 QA ‘서연이’는 콘솔 뒤로 몸을 숨겼다. 도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여기서 소리 내면, 바로 끝이야.”
“그래도, 끝이 좋을지도.”
그날 이후, 도윤은 배포 지연 메일을 보낼 때마다 서연의 목뒤를 떠올렸다. 버그 리포트는 점점 길어졌고, 서연은 그를 찾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불안은 점이 아니라 면이었다. 점 하나 찍으면 퍼지고, 퍼지면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짧지만 뜨거운 구멍.
‘이건 일탈이 아니라 생존이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카프런은 이렇게 적었다. 긴장된 근육은 결국 타인의 몸을 찢으려 든다. 우리는 그 찢김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붙이려 했던 것이다.
금기란 다만 사각지대의 다른 이름. 그 사각지대에서 우리는 한시적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마지막 숨
당신도 언젠가 퇴근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누군가의 손끝이 닿기를 기다렸던 적 없는가.
아니면,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내밀어 본 적은.
기다리다 보면 정말로 닫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그 손을 잡아주겠는가. 아니면 그 손을 끊고, 온전히 혼자 남겨지겠는가.
나는 어떻게 되버린 걸까. 아니, 나는 언제쯤 그렇게 되어 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