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그 애랑 헤어져."
준이 말했다. 아니, 명령했다. 술집 구석, 담배 연기 섞인 조명 아래서. 지수의 손을 잡고 있던 나는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수는 고개를 숙였고, 준은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엔 더 느리게, 더 깊숙이.
"네가 지수를 망치고 있어."
그 순간 지수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나는 그의 눈을 봤다. 거기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로 끝났다. 단 한 마디도 없이.
입이 열리지 않는 이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지킬 생각은 안 했을까. 아니, 왜 못했을까.
준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지수와 나를 소개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형'이었다. 술자리에서도, 여행에서도, 싸움에서도 항상 앞장섰다. 지수는 준 앞에서만 유난히 작아졌다. 내가 "너네 둘이 뭐야?"라고 물으면 지수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뭔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다. 준이 지수의 첫사랑이었다. 고백했지만 거절당했고, '오빠'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런데 내가 나타났다. 준은 처음엔 좋아했다. "우리 지수 좀 챙겨라"며 웃었다. 하지만 지수가 내 손을 잡는 걸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라진 대화
"너무 많이 만나는 거 아니야?"
"그런 옷 입지 마."
"술은 왜 또 마셔?"
준의 말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지수는 매번 변명했다. "아니야, 내가 좋아서 그래." 하지만 그 말은 준에게 닿지 않았다. 준은 지수의 약점을 너무 잘 알았다. 아버지의 폭력, 엄마의 가출, 혼자 남겨진 밤들. 준은 그걸 들먹였다. "너 또 누굴 믿다가 다칠래?"
나는 처음엔 몰랐다. 지수가 매일 준에게 카톡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는 걸. 준이 "ㅇㅇ"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지수가 전화를 걸어 묻는 걸. "내가 뭘 잘못했어?" 지수는 준의 인정이 없으면 하루도 못 버텼다. 준은 그걸 알았고, 이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했다. 왜냐고? 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침묵
민석은 29세, 게임 회사 다닌다. 그의 여자친구 혜진은 둘도 없는 절친 수진과 함께 산다. 수진은 혜진의 모든 걸 알고 있다. 과거 남자친구, 가족 문제, 심지어 성적 취향까지.
"수진이 너 싫대."
혜진이 말했다. 술 한 잔 마신 뒤, 조심스럽게.
"뭐가 싫대?"
"그냐... 네가 나한테 너무 집착한다고."
민석은 웃었다. 집착? 그는 혜진이 하루에 10번도 넘게 수진에게 카톡하는 걸 봤다. 점심 뭐 먹을지, 옷 어떤지, 사수가 뭐라 했는지. 모든 걸 수진에게 먼저 물었다. 민석이 "나한텐 말 안 해?"라고 물으면 혜진은 "수진이는 오래됐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민석은 수진을 만났다. 혼자.
"혜진이 너무 의지하고 있어요."
수진은 쿨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그걸 바꿔야죠."
"어떻게요?"
"떠나면 되잖아요. 혜진이는 당신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
민석은 그날 혜진에게 말했다. 떠나겠다고. 혜진은 울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수진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민석이 헤어지자는데 어떡해?" 수진은 대답했다. "그래, 너한텐 좋은 일이야."
민석은 혜진이 수진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봤다. 그리고 그는 뭘 말해야 할지 몰랐다. 수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은 더 깊은 두려움. 만약 자기가 아니라 수진을 선택한 거라면?
금기의 뿌리
우리는 왜 사랑 앞에서도 주저할까. 누군가가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면 왜 그 말에 흔들릴까.
심리학자들은 이걸 '사회적 동의'라고 부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쫓겨나는 걸 두려워한다. 연애도 예외가 아니다. 친구, 가족, 동료의 시선이 우리의 선택을 지배한다. 특히 여자들은 더 강하다. 여성은 진화적으로 집단으로부터 버림받는 게 곧 생존과 직결됐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이 인정하는 남자'를 본능적으로 찾는다.
하지만 남자들도 다르지 않다. 민석이 말했잖아.
"만약 내가 수진이를 이기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건 단순한 패배감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받지 못한 남자라는 낙인. 준도 그랬다. 지수에게 "나보다 더 나은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먼저 망가뜨렸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지수는 그 말에 굴복했다. 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마지막 질문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준, 누군가의 수진을 만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다. "진짜로?" 그 순간 당신은 입을 다문다. 아니, 이미 다물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의 침묵 앞에서, 아니 누구의 허락 없이, 사랑을 포기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