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영은 마지막 봉투를 뜯었다. 레이스 장식이 달린 하얀 봉투 안에는 샴페인 선물권이 아니라 A4용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맨 위에 적힐 법한 예쁜 문구 대신, 고른 탁자 서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시부모 생신은 항상 1순위.
2. 명절 전날 귀성, D+2 귀가.
3. 첫 아이 이름은 장례 절차까지 고려.
서영의 손이 떨렸다. 봉투 뒷면에는 축의금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입구컷처럼 놓인 조건들
왜 하필 결혼식 당일이어야 했을까.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배 대신 내민 이 짧고도 날선 목록은 삶 전체를 각인시키는 브랜딩 같았다. 그날 이후 서영은 매년 명절마다 그 봉투를 꺼내 든다. 봉투는 구겨지지도, 잊히지도 않는다. 단지 점점 더 눅눅해질 뿐.
이건 축복이야, 경고야? 아니면 상리찬관계 같은 거야?
욕망을 누가 더 많이 쥐고 있었나
조건을 단 쪽은 누구였을까. 시댁? 부모님? 아니면 애초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는 서영에게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미래를 설계해 왔다—좋은 대학, 취업, 그리고 ‘좋은 가문’과의 결혼.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서영은 단 한 번도 결혼 다음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묻지 않았다.
조건은 사실 축하의 가면을 쓴 겁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네게 투자한 지분에 대한 배당을 받겠다는 고지였다.
사례 1: 민지, 31세, 결혼 3년차
민지는 혼인신고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혼집 현관에 붙은 포스트잇 세 장을 발견했다. 손님들이 떠난 뒤, 시댁에서 미리 붙여 둔 것이었다.
- 인터폰 비밀번호 1023(시어머니 생일)
- 냉동실 오른쪽에는 김치만, 왼쪽은 시아버지 간식
- 침대건조기 사용 금지(전기세)
민지는 남편 현수에게 물었다. “이런 거 네가 미리 알았어?”
현수는 TV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잠시 내려놓았다.
아, 그거... 엄마가 당분간 우리 좀 도와주신다고.
도와준다는 건, 그만큼 더 많은 통제권을 뜻했다. 민지는 그날 밤 침대건조기를 몰래 켜고, 습한 이불 냄새를 숨죽여 맡았다. 내 집인데, 왜 내가 숨어야 할까. 포스트잇은 계속 붙어 있었다—노란색 모서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손때로 검게 변했다.
사례 2: 현철, 35세, 재혼 1개월차
현철은 재혼하면서 장인어른에게서 카드를 한 장 받았다. 검은색 홀로그램이 번쩍이는 VIP 카드였다. 뒷면에는 은행 계좌번호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결혼 첫날부터 5년 후까지, 매월 1일마다 사진 3장 업로드. 조건 불이행 시 지원금 중단.
장인어른은 미래 사위에게 아무런 대출도, 집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단, 결혼 생활의 그 순간순간을 기록해야 했다. 처음엔 다정한 사진 몇 장이었다. 현철은 아내 지원과 함께 셀카봉을 들고 웃었다. 하지만 사진은 어느새 점검 대상이 되었다. 오늘은 왜 안 올렸니? 장인어른의 카톡은 밤마다 울렸다. 결국 현철은 지난주, 아내와 함께 찍은 침대 셀카를 업로드했다.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다 말았다. 그가 찍은 것은 눈부신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각본에 맞춘 포즈였다.
우리는 왜 이 계약의 향기에 취하는가
우리는 원래부터 조건을 좋아했다. 나이 들면 시집 가야지, 남편 믿고 살아야지, 아이는 두 명이 적당하지. 미리 짜인 각본 위에 우리는 주연처럼 서 있지만, 사실은 조연에 불과하다. 조건이 없으면 오히려 허탈하다. 선택지가 무한대로 펼쳐지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제한된 카드 안에서만 승부를 거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봉투를 받고도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숙제가 뚜렷해졌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돌아서서, 봉투를 침대 서랍 맨 밑에 넣어 둔다. 훗날 아이가 자라면 그 봉투를 꺼내 보여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이도 이미 새로운 봉투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결혼식엔 누가 펼쳐줄까
당신은 아직 결혼을 안 했을 수도,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봉투는 어딘가에 존재한다. 당신이 받은 조건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당신은 그걸 지켰나, 아니면 어디쯤에서 벌써 어겼나? 봉투를 찢어버릴 용기는 없었겠지만, 뒤돌아서서 궁금해질 거다. 만약 봉투 안에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연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