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말을 꺼내기 전에 몸이 먼저 닫힌다
"사랑한다. 그건 변함없어." 재민이 침대 맡 벽에 등을 붙이고 속삭인다. 새벽 2시 17분, 시계의 초침 소리가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유진은 침대 시트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느낀다. 코끝에 스미는 건 재민이 쓰던 침대 세제와—이상하게도—약간의 타버린 냄새. 재민의 손이 유진의 어깨를 스칠 때마다 불꽃 튀는 듯한 뜨거움이 번쩍이고 사라진다. 그 뜨거움이 무엇을 억누르는지, 유진은 짐작하지 못한다.
"그럼 왜 안 돼?" 유진이 속삭인다. 목끝이 바싹 타오른다.
"…그냥, 오늘은 싫어." 재민이 눈을 깜빡인다. 눈동자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꺼져가는 무언가가 있다. 유진은 속옷 단추를 꼭꼭 채운다. 옷이 몸에 달라붙는 촉감이 미끌거린다. 민망함이 아니라,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두려움이다.
숨겨진 폴더 속에선 불이 타오른다
밤마다 유진은 재민이 잠든 틈에 휴대폰을 열어본다. 네이버 검색창에는 이미 자동완성 돼 있다. 접촉 공포, 성적 무관심, 친밀감 거부장애. 아무것도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 재민은 분명히 사랑한다. 다만 ‘사랑’이라는 단어 뒤에 오는 목적어가 유진의 몸은 아니라, 유진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민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노트북 화면이 꺼지지 않았다. 유진이 마우스를 움직인다. 바탕화면 한켠에 숨겨진 폴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archive_2018. 클릭.
썸네일이 줄지어 선다. 따뜻한 햇살 아래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린다. 키스하는 장면. 부둥켜안는 장면. 재민의 목덜미에 입 맞추는 여자. 그녀.
유진은 화면이 뿜어내는 빛에 얼굴이 하얗게 달아오른다. 숨을 삼키는 순간, 뒤에서 재민의 발소리가 다가온다. 유진은 노트북을 닫고, 몸을 돌린다. 재민은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아무 말도 없다. 유진은 재민의 머리카락 냄새가 아직 타버린 냄새와 섞여 있다는 걸 안다.
"…그 여자 아직 좋아해?" 유진이 묻는다. 재민은 대답 대신 눈을 감는다. 침묵이 유진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사실
재민은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는 것,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유진은 대학 동창에게서 조각조각 듣는다. 재민의 첫사랑은 재민의 절친과 바람을 피웠다. ‘그날 이후 재민은 술만 마시면 누구와도 침대에 눕지 않았대.’ 동창은 말한다. ‘그 애는 자기 안의 불씨를 믿지 못해. 불씨가 옮으면 또 누군가를 태울까 봐.’
유진은 재민의 몸 위에 손바닥을 얹는다. 체온은 뜨겁다. 그러나 손끝이 닿는 곳마다 재민의 근육이 경직된다. 유진은 재민의 눈동자를 마주친다. 그 속에는 사랑이 있다. 하지만 사랑의 끝에 커다란 ‘그러나’가 걸려 있다.
"너는 날 사랑하는데, 나를 원하지는 않는 거야?" 유진이 속삭인다. 재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세하게 고개를 저는 듯하다가 멈춘다.
욕망을 숨기는 순간, 나는 누구가 되는가
유진은 잠이 들지 않는다. 머리맡 스탠드 불빛이 눈을 찌른다. 재민은 코를 골지 않고, 규칙적인 숨을 쉰다. 유진은 재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실크처럼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을 벗겨내면 아래에 뼈와 살이, 그리고 그 아래에 뜨거운 불씨가 있다. 재민은 그 불씨를 끄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불씨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나도 역겨워. 내가 먼저 욕망해서 미안해." 유진이 속삭인다. 재민은 잠든 척한다. 유진은 재민의 목덜미에 입을 대본다. 부드러운 살결 아래로 맥박이 두근거린다. 그 맥박은 거기만큼 뜨겁다. 그러나 재민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유진은 눈을 감는다. 눈꺼풀 뒤편에서도 타버린 냄새가 맴돈다.
끝나지 않는 질문 대신, 한 줄의 행동
새벽 3시 1분. 시계의 초침이 딸각거린다. 유진은 재민의 손을 잡는다. 그 손은 뜨겁다. 재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유진은 재민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뜨거운 피부를 느낀다. 재민은 눈을 뜨지 않는다. 유진은 재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재민은 잠시 숨을 멈춘 듯하다가, 천천히 손을 떼어낸다.
유진은 재민의 머리카락을 한올 잡아당긴다. 재민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유진은 재민의 머리카락을 입에 넣고, 살짝 씹는다. 타버린 냄새가 입안에 번진다. 재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주 작은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속에는 답이 없다. 다만 유진은 안다. 재민은 아직도 불씨를 품고 있다. 그 불씨를 꺼트리지도, 누군가에게 넘기지도 못하고, 오직 자기 안에 가둬 두고 있다. 유진은 재민의 머리카락을 내뱉는다. 타버린 냄새가 잔혹하게 혀끝에 남는다.
침대 위, 두 사람 사이는 30cm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30cm는 지구 반대편처럼 멀다. 유진은 재민의 눈을 마주친다. 재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주 작은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속에 무엇이 남았을까.
유진은 재민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타버진 냄새만이 침묵을 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