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야?"
"미안, 피곤해."
그 한마디가 문 앞에 붙은 메모처럼 떨어질 때, 나는 다시 한 번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면 손수건 아래 숨겨진 콘돔 47개. 수요일마다 한 개씩 샀으니까, 정확히 47주째. 첫 포장은 벌써 먼지가 쌓여 누렇게 변색됐다. 뜯지도 못한 채.
흔들린 심장대신, 흔들리지 않는 메트로놈
우리는 2년 전부터 ‘그날’을 말하며 살았다. 아이 수유 끊고, 밤마다 울던 아기가 돌잔치 하고, 유치원 적응 끝나면. 그러다 보니 ‘그날’은 하루가 아니라 끝없는 연기된 미래가 돼버렸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돼버린 거야.
그날 밤, 민서는 샤워를 하고 침실에 들어섰다. 수건 두른 모습이 낯설어서 눈길을 피했다. 남펵 준혁은 누워서 휴대폰을 넘기며 베게 냄새를 맡고 있었다. 2년 만의 신호. 그래도 손끝이 떨렸다.
"오늘이야?"
말이 나온 건 나였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말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복부를 지나는 시선이 겹치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웃음을 낳았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가, 그만큼 오래 말없이 누웠다. 민서의 손이 준혁의 허리를 스쳤을 때, 그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살며시, 하지만 분명히.
꿈꾸던 첫 번째 입맞춤
2년 전만 해도 다르긴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단 3주 만에, 우리는 말없이 ‘통금령’을 내렸다. 피가 섞인 것 같은 스티어링 휠 냄새, 아기 젖 냄새, 젖꼭지를 갉아먹던 통증이 뒤엉킨 밤들.
그때 준혁은 민서의 가슴을 만지려다가 손을 거둔 적이 있다. 아이가 울어서? 아니면 움켜쥔 유방이 엄마가 아니라 여자를 떠올리게 해서? 그날 이후 민서는 준혁의 손을 보며 속으로 빌었다. 괜찮아, 2년만 참으면 다시 돌아올 거야.
그래서 기다렸다. 밤마다 유모차를 밀며 아파트 단지를 돌 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상상했다. 손가락으로 민서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준혁, 숨소리를 담은 키스. 그 환상이 내 발목을 잡고 두 발로 서게 만들었다.
어두운 실험실의 47주
준혁은 매주 수요일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콘돔 한 개를 샀다. 그건 곧 민서를 위한 약속 증표였다. 캐셔는 매번 똑같은 미소로 바코드를 찍었다. 준혁은 그 눈빛이 자기를 알아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늘 면목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준혁은 집에 와서 콘돔을 민서에게 내밀었다.
"다음 주엔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민서는 베이비시터를 구해놨었다. 그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그래도 준비는 됐고, 믿고 있었다.
무너진 첫 피스터
그날 밤, 민서는 준혁의 등을 쓰다듬었다. 뼈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낯설다. 준혁도 민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촉촉한 샴푸 향이 아닌, 젖은 수건 냄새가 났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졌지만,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괜찮아?"
준혁이 물었다. 민서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여기가 아니야.
준혁의 손끝은 2년 전의 기억을 찾고 있었다. 가슴 아래 복부, 허벅지 안쪽. 하지만 민서의 가슴은 아기가 빨았던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굳어 있었다. 준혁은 그 흔적을 만지다가 손을 떼었다.
민서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기의 첫 울음소리, 밤새 달려가던 발바닥, 창밖으로 새벽 4시를 보며 흘린 눈물. 그게 전부였다.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준혁은 민서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때, 민서는 눈을 떴다. 준혁의 눈동자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아니, 피곤함이 아니라 피로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지친 건 몸이 아니라, 관계 자체였다.
우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민서의 몸은 2년 전의 자신을 못 찾고 있었다. 준혁 역시 민서의 반응을 떠올렸다가 지금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봤다.
민서는 준혁의 몸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민서는 준혁이 아니라 아기의 냄새가 났다가도 했기 때문이다. 그건 준혁이 아니라,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텅 빈 방
끝나고 나서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하지만 몸은 가까웠고, 심장은 멀었다.
준혁이 민서의 이마에 키스했다. 민서는 준혁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하지만 둘 다 말이 없었다.
콘돔 한 개는 사용됐고, 46개는 여전히 서랍에 있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들은 ‘감정적 부동산’이라는 말을 쓴다. 오랜 시간 기다리면서, 우리는 상대를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우리는 투자금을 회수하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에게서 ‘투자’가 아닌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2년은 너무 길었다. 민서는 엄마가 됐고, 준혁은 아빠가 됐다. 우리는 부부가 아닌, 부모가 돼버렸다.
마지막 질문
그날 밤, 민서는 준혁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눈 속에서, 민서는 2년 전의 자신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민서는 준혁에게 그렇게 물었다.
"우리,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