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주차장. 차 안에 둘만 있다. 시동은 꺼졌고, 유리창은 까만 영화관처럼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한다. 아직도 손에 든 커피가 미지근하다. 20년을 함께 산 남편, 상필이 내가 내민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말했다.
“그래, 나도 사실 너보다 6년 먼저 그녈 만났어.”
첫 연애처럼 떨리는 고백
나는 내 연인 ‘현서’의 이름을 처음 꺼낼 때 입술이 떨렸다. 이건 아내의 고백이 아니라 여자의 고백이다. 그 순간 나는 47세 주부가 아니라 20년 전 처음 연애할 때처럼 귀가 화끈거리는 애송이가 되었다.
“나, 작년부터 누굴 만나고 있어.”
상필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담배를 내려놓고 웃었다. 그게 화내는 웃음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동조인지 한참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 나도 너한테 똑같이 말하려 했는데.”
욕망의 해부, 혹은 ‘우리’가 아닌 곳에서 피는 꽃
결혼 20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다. 같은 침대, 같은 밥상, 같은 스마트폰 알람. 그만큼 몸과 마음의 결핍도 똑같이 커졌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건 남편이 아니라 외부의 누군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현서는 나를 ‘은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은실 씨’라 불렀다. 존댓말 하나가 주는 낯선 설렘.
상필의 연인 ‘혜진’은 그에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게 했다. 15년째 덮인 전자피아노 위에 먼지를 털어내고, 그는 처연히 소나타 14번을 흥얼거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서로를 대신해준 존재라는 생각에 스산함과 환희가 뒤섞였다.
당신도 모르게 실제 같은 이야기
사례 1 | 은실 & 상필, 남산 뒷길 술집
상필이 처음 혜진을 만난 건 지하 베이스문 술집이었다. 그는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혼자 앉아 있었는데, 혜진이 건너편 의자에 앉아 물었다.
“혼자오셨어요?”
상필은 그 질문에 웃음이 났다. 20년 동안 ‘혼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집에 가면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사촌 결혼식 안내 문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는 혼자였다. 그 혼자라는 말에 방금 전까지는 아내도 아이들도 존재하지 않았던 쾌감이 스며든다.
나는 현서와의 첫 키스가 2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급행이 지나갈 때마다 떨리는 창문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반사되었다. 우리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다만 손을 잡았고, 손등에 새겨진 반지 자국이 눈에 밟혔다. 반지가 없던 손. 그 손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반지를 끼울 수 있었다는 상상에 가슴이 뛰었다.
사례 2 | 미정 & 재호, 18년 차 부부
미정은 재호에게 연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러나 재호는 미정의 카톡을 본 적이 있다. ‘재호와는 다르게…’라는 문장이 눈에 꽂혔다.
새벽 2시, 재호는 미정의 휴대폰을 열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미정과 ‘도현’ 사이의 대화를 읽으며, *‘우리가 18년 동안 서로를 얼마나 지루하게 만들었는지’*를 실감했다.
다음 날 아침, 재호는 미정에게 말했다.
“나도 아는 여자 있어.”
미정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녀는 그날 저녁, 도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는 숨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왜 우리는 부부의 외도를 용인하는가
결혼이란 계약은 ‘상대의 전부’를 독점한다는 착각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진짜 전부를 모두 파악한다. 숨쉬는 패턴,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부르는 노래 절도까지. 그 정보가 너무 많아지면, 서로의 욕망은 오히려 반사된 실루엣처럼 흐릿해진다.
외도는 새로운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나’는 남편이 본 ‘아내’가 아니라, ‘은실 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다. 부부는 서로에게 윤리적 최종 해상도를 요구하지만, 욕망은 그보다 낮은 해상도로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외도는 결혼의 부정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에게 흥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닫히지 않는 문
나는 상필에게 물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서 외로웠던 거야, 아니면 외로워서 사랑했던 거야?”
상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잠든 사이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혜진이 만든 상필과 현서가 만든 은실이 차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해 사랑하고,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부부인 척한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연인에게 어떤 ‘우리’를 말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