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눈 떠요.”
새벽 3시 47분. 지수는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간판붛빛만으로도 남편의 눈썹이 까맣게 선 것을 확인했다. 형광등도 켜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살짝, 살짝 올려본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 소리도 없었다. 아니,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두 시간 전쯤.
아직도 덜 식은 손등이 닿는다. 침대 옆 탁자 위 유리잔엔, 기념일이라고 더 넣은 꽃가루가 가라앉아 있었다. 샴페인이 아니라 수면제였다는 건, 지수만 알고 있다.
그와 나의 마지막 몸부림
지수는 남편의 반팔 티를 걷어 올린다. 가슴에 붙은 체온이 아직도 뜨거운데, 심장은 말을 잊었다. 눈앞이 흐려지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귀를 대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듣는다. 지난 7,300밤 동안 들어온 숨결이 이 방 끝자락 어딘가에 아직 맴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죽음이 옆에 누워 있는데… 왜 나는 떨림보다 설렘이 먼저일까.’
옆구리에 박혀 있던 팔을 빼서, 지수는 남편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로 옮긴다. 샴푸 냄새는 아침에 씻기지 않은 것 같다. 평범한 향, 그러나 그 냄새가 사라진 날을 상상하니 갑자기 목끝이 메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다. 미세하게 굳어가는 감촉. 그 순간, 20년 전 신혼 첫날밤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입술이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던 그날, 그 감정이 다시 찾아온다.
아직 덜 지긋한 20년
2004년 4월, 연희동 다세대주택 2층. 벽지가 뜯긴 방 한 칸에 들어선 그날, 지수는 침대를 가운데 두고 ‘이방인’이 되었다. 책 한 권 없이 옮겨 온 건 남편의 체온뿐이었다. 첫날밤, 남편은 커피를 흘리며 “죄송”이라고 말했고, 지수는 그 표현이 너무 애틋해서 웃었다. 누구도 미안할 일이 없는데 말이다.
그날 이후로, 그와의 침실은 늘 0.5초 늦은 숨을 썼다.
남편이 먼저 잠드는 밤이 대부분이었다. 지수는 옆에서 엎드려 그의 콧잔소리를 녹음이라도 하듯 가만히 들었다. 5년 차엔 아이가 생겼고, 10년 차엔 남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년 차엔 시댁 식구들과 연락이 끊겼다. 20년 차엔 서로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침대만은 매일 밤 두 사람의 뼈를 똑같은 각도로 굽었다.
카페 ‘리브’ 단골 여자
그녀는 매일 오후 2시, 손목에 시계를 두 번 두드리며 카페를 찾았다. 이름표 ‘유진’이 붙은 여자. 지수는 그녀를 ‘남편의 마지막 욕망’이라 부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유진이 건네준 종이컵에 적힌 번호는 남편의 지갑 속에 있었다. 지수는 그 숫자를 복사해 냉장고 문에 붙여놓았다. 한 달 내내. 그러다 지난주, 남편이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수면제를 샀다.
‘죽음은 내 차지고, 유진은 네가 가져라.’
욕망은 왜 죽음과 뒤엉키는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지수는 느꼈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라는 문장 속에서 계속해서 죽어간다. 남편은 불륜의 끝자락까지 가본 뒤에야,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수는 그 몸을 처음으로 ‘자기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아니었다. 죽은 뒤에야.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집착은 상실에 대한 슬픔보다 강하다고. 즉, 누군가를 잃는 게 아니라 ‘잃지 못하는 나’를 잃는 게 더 공포라고. 지수는 그 공포를 느끼지 않기 위해, 남편의 시신을 침대에 그대로 두고 싶어했다. 냉장고에 넣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너도 방 한가운데 시체를 품고 싶은 적 있니?
지수는 새벽 5시 12분, 드디어 눈을 감긴다. 남편의 눈꺼풀이 닳도록, 그녀의 눈꺼풀도 닳도록. 문 밖에선 아들이 학교 가방을 끌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는 아직 자는 중이야.”
나는 죽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산 너를 사랑하는 말보다 더 진실할까.
지수는 남편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대어본다. 차가워진 손끝이 살아 있는 가슴 위에 놓이자, 반대로 살아 있는 가슴이 차가워진다. 이제 남은 건 둘 뿐이다. 시신을 발견할 119. 알고 지내온 자장면집 아저씨. 그리고 침대 한복판에 남겨질 ‘사랑의 반대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수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 하루, 네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아침에도, 점심에도, 밤에도 문을 열지 않을 작정이다.
너는 어떤가. 너도 누군가를 잃은 뒤, 방 한가운데 영원히 누워 있게 하고 싶은 적 있었나. 그리고 그 욕망이 너무 커서, 현실을 모두 속이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