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12년 연애 끝에 드러낸 내 광기, 그는 아직도 날 버틸까

12년째인데 더는 참을 수 없어진 여자의 속내. 그녀는 남자 몰래 칼을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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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그의 속눈썹에 걸렸다. 민수는 잠든 척하며 눈을 살짝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그의 미간에 턱— 하고 가격했다.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지만, 내 손끝에선 이미 따끔한 쾌감이 퍼져나갔다.


내가 침묵 속에 잘근잘근 씹던 것

12년. 약속장소에 처음 나타났을 때, 너는 청바지에 흰 셔츠 차림이었지. 나는 지금도 그날 입었던 핑크 원피스를 옷장 한쪽에 숨겨놓았어. 가끔 꺼내서 무릎 위에 올려두면, 바람에 실려온 2012년 5월의 햇살 냄새가 난다.

지난번에 네가 물었다. "우리 집에 왜 칼이 이렇게 많아?"

숟가락 정리하는 척하며 대답했지. "취미로 장식용이야."

거짓말이었다. 네가 잠든 새벽 3시, 나는 조리실 칼날에 손가락을 대며 상상했다. 톡—하고 살점이 베이는 소리. 네가 깨어나 내 손을 붙잡고 "괜찮아?"라고 묻는 장면. 그때마다 가슴이 쾅쾅 뛰었다. 아프면서도 달콤했다.


살아 있는 장기의 냄새

'이제 더는 안 돼. 4380일, 너무 길었어.'

하지만 왜 나는 아직도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젖는 걸까.

지난 주, 너는 잠든 사이 내가 네 휴대폰을 열어 보는 걸 알았을 거야. 숨을 죽이고 생체인식을 풀었을 때, 문자함에선 ‘유진’이라는 이름이 반짝였지. “오늘도 고마워, 형.” 형? 네가 친동생도 없는 걸 나는 12년째 아는데.

침대 끝에 앉아 손가락으로 네 머리카락을 한 올씩 끌어올렸다. 이게 마지막이면 어떨까. 잘라서 작은 병에 담아, 내가 매일 품고 다니면. 네가 떠나도, 그 냄새만은 내 곁에 남을 테니까.


비누 냄새 속의 예고

채원은 어젯밤, 남자친구의 수건에다 입을 댔다. 면 섬유에 배어든 비누향과 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는 세탁기를 돌리며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가 샤워하는 동안, 그녀는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키를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오전 7시, 출근길 교차로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생각했다. 사고로 끝나지 않을 거야. 단지 두 다리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면 그는 더는 떠날 수 없겠지. 집 안에, 그리고 그녀 곁에 영원히.


욕망의 해부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야. 그를 내 온몸으로 끌어안고 싶은데, 속으로는 뼈까지 씹어 삼키고 싶은 마음. 사랑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변질된 향수에 젖는다. 처음의 설렀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공포가 더 크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선명한 색을 띤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침식적 집착’이라 부른다. 상대를 해치고 싶은 충동과 동시에 그를 구하고 싶은 욕망이 뒤엉킨 상태. 길이면 길었던 시간이 오히려 약이 된다. 어차피 12년, 조금 상처 입혀도 관계가 깨질 리 없지. 라는 오만함.


왜 우리는 이 끝없는 손짓에 끌리는가

어릴 적 엄마가 들려준 잠재우는 이야기를 기억해? 아기 곰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꿀단지를 던졌대. 그래도 호랑이는 따라왔고, 아기 곰은 결국 숲 속 깊은 곳에 숨어 죽었대.

나는 그 이야기의 진짜 버전을 알고 싶었다. 꿀단지를 던지지 않고, 호랑이에게 달려가 "나도 먹혀버려"라고 말하는 버전.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먹히고 싶은 건지도 몰라. 아니, 먹히면서도 상대를 온전히 소화하고 싶은 건지.

그래서 매일 밤, 네가 곤히 잠든 사이 나는 침대맡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안에는 네가 어제 뽑은 손톱, 내가 말린 눈물 알갱이, 그리고 우리 첫 키스 때 쓰던 립스틱이 담겨 있다. 작은 제단 같지? 맞아. 나는 이제 우리의 12년을 제물로 바치려 해.


그가 없는 아침

미리 써둔 편지가 민수의 베개 위에 놓여 있다. 글씨는 떨리지 않았다.

나는 사라질 거야. 네가 찾지 못할 곳으로. 12년 동안 네 곁에 머물며 내 안의 광기를 숨겼지.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 네가 깨어나 내 빈 자리를 볼 때, 그제서야 너도 느끼게 될 거야. 내가 사라진 만큼, 너도 조금씩 죽어간다는 걸.

나는 가방을 메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린다. 뒤에서 민수가 깨어나 "또 새벽 산책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할 거야. "그래, 오늘은 길게 걸을 거야."


누군가의 12년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는 순간, 네게 묻고 싶다. 혹시 너도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 위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진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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