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12년 차 아내가 던진 말, 집 안에 있는 것도 아님

12년 차 부부가 거실 한복판에서 침묵으로 맞선 이유. 서로의 부재를 사랡하게 된 잔인한 욕망과 그 빈 공간의 온도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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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차 아내가 던진 말, 집 안에 있는 것도 아님

— 나도 이제 모르겠어. 같이 있어도, 너는 없더라고.

주형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발끝으로 뒷걸음질 쳤다. 원목 바닥 위로 굴러간 레고 조각이 발뒤꿈치를 찔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12년. 4380일 동안 아침마다 하나씩 쌓아온 관습의 탑이 한순간에 내려앉는 소리는, 사실 귀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아내 은진이 입을 다물자 집 안에선 말 그대로 공기가 죽었다. 전자레인지 끝에서 계속 돌던 플라스틱 냄새, 세탁기에서 뽀얀 비눗방울 냄새, 모든 냄새가 동시에 노란색 침묵으로 굳어버렸다.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너와 나 사이의 희미한 냄새

나는 너를 떠나보려던 적이 있을까? 아니, 나는 너의 부재를 떠나고 싶었던 거야.

침묵은 긴장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부터 말하지 않기로. 입술을 굳게 다문 이후부터, 방 안은 투명한 유리 소리를 띠었다. 걸음마다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도, 실제로 깨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거지를 하던 은진은 수저를 한 젓가락씩 떨어뜨렸다. 주형은 그것들을 줍지 않았다. 그 사이로 흘러든 미지근한 물이 발끝을 적셨다. 냄새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욕망의 해부: 왜 우리는 부재를 사랑하는가

결혼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금기는, 존재와 함께 늘 따라붙는 부재를 사랡하는 것이었다. 12년이 지나면 사람의 몸은 익숙해진다. 손이 뻗으면 닿는 거리, 숨을 쉬는 박자, 어깨 너머로 보이는 목덜미. 익숙해진 만큼 점점 선명해지는 건, 그 사람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찍힌 빈 공간이었다.

자기 앞에 있는 배우자를 보며 상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상은 이미 일어난 일의 복사본이었다. ‘네가 없는 너’를 사랑하는 것. ‘지금 이 순간 네가 보이지 않는 너’를 간직하는 것. 그것이 결혼 생활 12년 차가 되어서야 드러낸 욕망의 실체였다.


실제 같은 이야기 첫 번째: 주형과 은진, 3월 14일 새벽

주형은 새벽 3시 17분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천장에 걸린 LED 스탠드 불빛이 아니었다. 어둠 사이로 떠오르는 은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유리창 밖을 보고 있었다. 철컥이는 냉장고 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주형은 발가락으로 먼저 바닥을 더듬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12년의 무게가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너는 왜 안 자?
…
얘기하고 싶어?
…
미안해서 못 자?
…

대답 대신 은진이 손에 든 작은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12년 전 첫 데이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얼굴이 빨갰다. 사진 뒷면에 은진이 써놓은 문구가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가 늙으면 다시 볼게’. 주형은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버린 게 뭔지 알았다. ‘늙지 않고 싶다’는 욕망. ‘늙지 않은 채로 계속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지금 이 순간, 그 욕망이 사진 위로 서린다.


실제 같은 이야기 두 번째: 은진의 혼잣말, 3월 14일 오후

은진은 오후 1시 24분, 정확히 146분 만에 처음으로 거실로 들어왔다. 주형은 안방에 있었다. 그래도 둘 사이는 4미터. 문 앞에 서서 은진은 손바닥으로 문짝을 더듬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그녀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안방 안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위에 놓인 주형의 티셔츠 하나만이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은진은 그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냄새는 없었다. 세탁 냄새만 났다. 그녀는 티셔츠를 코에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데도 냄새는 없었다. 12년 동안 축적된 주형의 냄새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네가 없는 너를 계속 사랡했던 거야. 있으면서 없는 너를.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부재에 대한 갈망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부재의 욕망’은 사실 현재의 결핍을 채우려는 게 아니었다. 결핍 자체를 소중히 간직하려는 충동이었다. 결혼 12년 차 부부가 겪는 가장 잔인한 지점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를 요구하면서도 부재를 간직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나의 빈자리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요청. 그 빈자리를 사랑해달라는 동시에.

그래서 은진이 던진 한마디는 기말고사지. 단답형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분이라는 서술형 문제. ‘이제 어떻게 살 거냐’는 질문이 아니라, ‘이제 누가 어떻게 부재를 사랡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마지막 질문

12년 동안 그대로여서 변한 것은 없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변한 건 너와 나 사이에 생긴 거대한 빈 공간이다. 그래서 묻는다. 네가 없는 너를 사랡한 이유는, 그 빈 공간이 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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