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뭐 할까?”
노란 샤넬 조명 아래, 세탁기 마치 마감하듯 유리문을 닫던 민수가 물었다.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세수하던 나는 스킨을 짜놓은 손등을 그대로 두고 거울에 떠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 질문. 똑같은 요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어깨 힘빼는 목소리. 일주일에 두 번 꼴로 피어오르는 이 위트 없는 질문이 우리를 망쳤다.
그가 사라진 밤
침대 옆 휴대폰 충전대엔 ‘민수’라는 이름이 아닌 ‘배터리 100%’만 떠올랐다. 처음엔 그래도 대답했다. 영화? 맛집? 혹시 오늘은 침대 위에 초콜릿을 뿌려놓고 침대를 놀이터로 만들까?
그때마다 민수는 한쪽 눈썹만 올려놓았다. 그게 다 뭐야. 그 눈썹 하나가 우리의 밤을 엎었다. 그 눈썹 하나가 나를 ‘그래, 니가 뭘 원하는지 그게 진짜냐?’고 고문했다.
결국 대답은 뻔해졌다. "그냥 잘래."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양치만 하고 들어왔다.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팔을 피해 뒤척이는 연습을 시작했다. 한때는 등꼍에 숨겨놓던 손이 이젠 허공을 어루만졌다.
욕망의 무게
그 질문 뒤에 숨겨진 건 단순한 ‘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었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었다.
나를 원하니, 아니면 그냥 무엇이든 채우고 싶니?
민수는 나를 원하는 게 아니었고, 나도 민수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할 거’를 원했다. 뭔가를 채워야 했다. 빈 공간이 두려웠다. 그래서 오늘 밤 뭐 할까는 사실 그래서 너 오늘 나 좋아하긴 하니? 라는,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진혜와 승준, 그리고 지하철 2호선
진혜는 승준에게 물었다. 목요일 저녁,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잘 시간이니까.
“오늘 뭐 하고 싶어?”
승준은 당근마켓을 뒤적이던 손을 멈췄다. 중고 킥보드나 샀다. 그가 고개를 들 때, 진혜는 벌써 아는 얼굴이었다. 그래, 너도 나도 뭔가 해야 하지만, 뭘 하고 싶은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날 밤, 진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장이 흐릿했다. 옆자리에선 승준이 코를 골았다. 그녀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 올렸다. 거실로 나가서 와인 한 모금. 그러고 나니 문득 기억났다.
일주일 전 지하철 2호선. 난간에 기댄 청년이었다. 검은 마스크 너머로 보이던 눈빛. 진혜는 가만히 그 눈빛을 따라가다 화면을 내렸다. 뭐 할까, 하며 두 손으로 휴대폰을 감쌌다. 그 순간, 그 눈빛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와, 오늘 너 할래?
와인이 혀끝을 때렸다. 알 수 없는 열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잠든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소파에 누워 다시 그 눈빛을 상상했다. 전등이 꺼지자, 그녀는 처음으로 민수에게 물지 않았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들은 이걸 ‘빈 공간 공포’라 부른다고 한다. 누군가와 둘이 있을 때 채워야 할 공백.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서로를 마주하는 것. 그 순간 우리는 발각된다. ‘사실 나는 너와 있어도 지루하다’는 사실을.
이 질문은 그래서 도발이다. 뭐 할까, 라는 한 방에 상대의 욕망을 노출하라는 협박. 그리고 그 욕망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고백. 그래서 부부들은 잠을 택한다. 잠은 유일하게 함께할 수 있는 무관심이니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민수가 고백했다. 어젯밤, 나는 그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익숙한 멍석 위에 앉아 그가 말했다.
말없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넷플릭스 목록이 쭉 떴다. “이 중 뭐 볼까?” 민수는 조용히 물었다. 나는 그가 내 손목을 잡는 걸 느꼈다. 살짝 덜컥이는 숨소리가 느껴졌다. 두려웠다. 뭘 골라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골라선 안 될지.
우리는 함께 뭘 고르는 연습조차 잊어버렸구나.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니, 속삭였다. “그냥 여기 있자.” 우리는 TV를 끈 채 거실 불도 끄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우리를 달궜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뭔가를 시작했다.
아직 답은 없다
오늘도 민수가 물을지도 모른다. “오늘 밤 뭐 할까?” 그래도 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겠다. 몇 초, 아니 몇 분 동안 침묵을 드리운 뒤, 이불 위로 손을 뻗을지 모른다. 손끝만 스칠지, 아니면 손등을 완전히 덮을지. 아직 모른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 누군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