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준영이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맞추는 순간, 나는 알았다. 아직도 안 끝났다는 걸. 세월이 흘러도, 다른 사람 품에 있어도, 이 남자만큼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다는 걸. 그 눈빛이 나를 지나치며 스칠 때, 3년 전 그날의 열독이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뜨거워서 질식할 뻔했던 그날의 기억
준영과 나는 종로 뒷골목 술집에서 자주 마주쳤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눈이 계속 가는 이상한 놈. 눈길이 스칠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화끈거렸다. 말은 없었는데도, 숨결이 닿았다. 술이 들어가면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시선. ‘이 사람도 나를 느끼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 때마다 가슴이 쾅쾅 뛰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같이 나와서 술 한 잔 더 마시자고 했다. 동네 뒷골목 포장마차. 그는 내 손등을 아주 천천히, 살짝 스쳤다. 그때부터였다. 손끝에서 시작된 불길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준영의 방 안에서 우린 서로를 파고들었다.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욕망의 해부: 왜 다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은 뜨거운 관계를 두려워한다. 타오르는 순간에는 최고지만, 그 다음은 재가 된다고. 나도 그랬다. 준영과 나는 불타다가 그만 끝났다. 사소한 질투, 오해, 현실의 벽.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너무 뜨거워서 내가 먼저 녹아버릴까 봐.
‘이건 위험해.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변해.’
3년 전의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 사로잡힘. 나를 나로 만들던 모든 게 녹아내리는 느낌. 그래서 끊었다. 차단했다. 장소를 피했다. 술집도, 동네도,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 옷도.
다시 만난 그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3년 만에, 인사동의 한 갤러리 오프닝에서 마주쳤다. 준영은 여전히 검은 눈동자에 불을 품고 있었다. 우린 눈을 마주치고, 3초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늦었네.”
준영이 다가왔다. 그 순간, 3년 전의 기억이 새까맣게 번뜩였다. 그날 밤의 숨결, 손끝의 떨림, 뒷목을 간질이던 입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은 웃었다. 아, 그 웃음. 여전히 나를 속삭이는 듯한.
“커피나 한 잔 할래? 아니면… 술?”
나는 모른 척 했다.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커피든 술이든, 결국은 그의 집이 될 거라는 걸. 3년 전과 똑같은 전개. 그래도 이번엔 꼭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나라고?
다른 사람의 사연: 수진은 어떻게 됐을까
나와 비슷한 시기, 수진도 다시 만난 사람이 있었다. 2년 전 헤어진 남자, 현수. 그녀는 준영과 나처럼 뜨거웠다. 헤어진 이유도 비슷했다. 너무 사랑해서, 자기 자신을 잃을까 봐.
수진은 다시 만났을 때, 한 가지를 달리했다. “이번엔 우리가 끊을 거야”라고 약속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결국 또 끊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아는 채로 시작하는 게 더 짜릿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니까, 끝날 각오로 만나는 거야.’ 그게 오히려 더 걸쳐질 수 없는 금기를 만들었다고.
결국은 또 다시 끊었다. 하지만 수진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 뜨거움을 다시 느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금기의 달콤함: 왜 우리는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돌아오는가
심리학적으로, 끝나는 걸 아는 관계는 오히려 더 강렬하다. 뇌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확실한 종말을 열망한다. 결국 끝날 거라는 걸 아는 순간, 우리는 마음껏 타버릴 수 있다. 미래가 없으니까. 책임도 없다. 집착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번에만’이라는 말이, ‘또 이번에만’으로 반복된다.
준영과 나의 3년 공백은 아무 의미 없었다. 딱 봐서 알았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의 허점을 파고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그리고 이번엔 누가 먼저 녹아버릴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마지막 질문
준영이 오늘 밤, 다시 문자를 보냈다. “집에 와. 아니면 내가 갈게.”
나는 아직 답장을 안 했다. 눈앞에 떠오르는 건, 3년 전 그날의 재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불씨다. 이번엔 정말 꼭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먼저 끊을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한 번, 불타버릴까. 그래도, 이번엔 꼭… 뭐가, 지켜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