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치료사가 물었을 때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남편이 내 몸에 남긴 흔적

결혼 15년, 첫사랡도 첫키스도 모두 그와였다. 치료사가 던진 단 한 마디 질문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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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가 물었을 때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남편이 내 몸에 남긴 흔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오후

"그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치료사의 목소리는 너무 담담했다. 나는 30초 동안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 마디가 목끝에서 뱀처럼 맴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요.’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결혼 15년 차다. 첫사랑도, 첫키스도, 첫 성관계도 다 그와였다. 그래서 내게는 비교 대상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사는 거겠지’ 하고 스무 살부터 되뇌었다.

그가 늦게 들어온 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목덜미에 새겨진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말없이 이불을 끌어올렸다. "오늘 누구 만났어?" "그냥 회식이야." 거짓말 냄새는 뻔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물러난 지 오래다.’


연수엔, 38세, 마케팅 팀장

연수엔은 매주 수요일 오후에 내원한다. 그녀는 남편의 ‘절제된 감정’을 즐긴다고 했다.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아요. 대신 3일 동안 말을 아끼죠. 그게 더 무서워요. 제가 먼저 사과하게 만들려고요.”

그녀는 지난주에 남편이 20년 전 고등학교 동창의 소식을 듣고 미소 지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미소 때문에 연수엔은 이틀 밤을 울었다.


민영이, 45세, 약사

민영이는 자발적 미니스커트 금지령을 내렸다. 남편이 "저렇게 입고 다니면 누가 봐도 안다"고 한 뒤로다.

“전 남편이 싫어하는 스타일은 하나도 안 해요. 그러다 보니 제 옷장엔 진청색 청바지와 무지 티셔츠만 남았어요. 어제 옷장 문을 열었는데 제가 초등학생 같더라고요.”

그녀는 남편이 퇴근 후에도 약국 앞을 서성이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를 감시하는지, 아니면 나를 지키는지’ 구분이 안 됐다.


왜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정체성이란 본래 흐릿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용광로에서는 더 빨리 녹아버린다. 상대의 눈빛 하나에 옷깃을 움츠리고, 한 마디에 하루 계획을 바꾼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두려움, 사실은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 못하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착한다. 상대의 하루 일과를 파고들고, 휴대폰 문자를 뒤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런데도 정답은 없다.


치료실의 침묵 끝에

"그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나는 결국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치료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어쩌면 같은 질문을 스스오게 되풀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기억하나요

당신은 아직도 ‘원래 내가 좋아했던’ 옷을 입는가? 아니면 ‘걔가 좋아하는’ 옷만 고르는가? 그 차이를 아는 순간, 그게 사랑인지 감옥인지, 당신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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