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피가 번진다

유리는 37번째 생일에 민재의 ‘사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눈물로 빌었던 네 시간째, 나는 그 눈 속에서 또 다른 거짓의 태아가 숨 쉬는 걸 보았다. 사과는 끝이 아니라, 다음 번 거짓말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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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피가 번진다

01. 눈앞에서 터진 유리잔

유리 파편이 발등을 스친다. 붉은 와인이 카펫 위로 흘러 내려가며 형체 없는 꽃을 핀다. 민재가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아직도 깨진 잔의 자루가 남아 있다.

“죄송해요, 진짜… 이번만은…”

그의 눈꺼풀이 떨린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지는 순간, 나는 본다. 동공이 한 뼘 더 깊게 파여 들어가는 것을. 눈동자 속에 새로 생긴 어둠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그건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거짓의 태아다. 아주 작고, 아직 피를 머금지 않았지만, 이미 숨을 쉬고 있다.

나는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뜨거운 와인을 느낀다. 아프다. 그러나 그 통증마저도 민재의 눈물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02. 37번째 생일, 녹음된 울음소리

한 달 후, 유리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두 번째 목소리를 듣는다.

  • 민재의 2분 34초 음성메시지. 술집 뒷골목의 쓸쓸한 에코가 뒤엉켜 있다.
  • “진짜 미안해. 너랑 있을 때마다 숨이 막혀. 내가 너무 나쁜 놈이야.”

유리는 플레이어를 멈추지 않는다. 그대로 재생목록을 넘긴다. 3년 전, 2년 전, 1년 전 민재의 음성이 줄줄이 이어진다. 총 36개의 파일. 각각이 민재의 생일마다 남겨진 ‘사과’다. 37번째는 아직 없다. 오늘, 그는 제 37번째를 만들어 보냈으니까.

노트북 화면 위로 유리의 반사가 비친다.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물도, 분노도, 민재의 어둠도.


03. 그날 밤, 수진이 말했다

“준호는 약혼식 초대장을 들고 왔어.”

수진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내 손에 죽은 끝물을 쥐어준다. 우리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발아래 도시의 불빛이 수백 개의 날개를 달고 흔들린다.

  • 5년 전, 준호는 눈물로 수진에게 사과했다. ‘당신 없인 죽을 것 같다’고.
  • 2개월 뒤, 준호는 다른 회사 동기와 결혼했다.
  • 지금, 준호는 두 번째 결혼을 앞두고 다시 수진을 찾아왔다.

수진이 눈을 감는다.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초대장 뒷면에 손글씨가 있더라. ‘아직도 네 생각이 나. 그날 밤 우리…’ 이래.”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입술 사이로 끝을 잡고 있다. 타버린 종이 냄새가 입안 가득 퍼진다.


04. 복수의 온도

후회는 가장 아름다운 복수다. 단, 상대가 후회하도록 만들 수 있을 때만.

유리는 민재의 37번째 생일을 맞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일 축하 메시지도, 전화도, 선물도. 그저 집 앞에 서 있는 민재를 CCTV로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비가 온다. 새벽 4시 12분, 민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는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수진은 준호의 카톡 47개를 모두 읽지 않은 채, 결혼식 당일 새벽에 직접 찾아간다. 예식장 대기실. 준호는 아직도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수진은 문을 밀치고 들어간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퍼지는 공포를 본다.

“이번엔 어떤 말을 준비했어?”

수진이 속삭인다. 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입술이 떨린다. 미리 연습했던 사과의 첫 음절이 끝내 나오지 못한다.


05. 나는 왜 너의 눈물을 기다리는가

옥상에서 내려오는 길, 나는 묻는다.

“왜 우리는 끝까지 믿고 싶어 할까?”

수진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그곳에는 5년 전 준호가 써준 반지 자국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씨는 지워졌지만 피부에 새긴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은 믿는 게 아니야. 그냥 다시 피를 보고 싶은 거지.”

손바닥 위에 새겨진 흉터가 달빛에 번쩍인다. 그것은 단순한 흉터가 아니라, 거짓말의 지문이다.


06. 금기의 문 앞에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나는 유리의 문자를 받는다.

  • “민재가 죽었다고 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데.”
  • “유서에 내 이름이…”

나는 전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다음 문자는 오지 않는다. 신호가 끊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더 이상 쓰지 못한 것인지.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얼굴이 흔들린다. 눈가에 걸린 그림자가 민재의 어둠처럼 깊어진다.


07. 마지막 눈물

아직도 누군가는 “미안하다”는 말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도 누군가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알았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사과가 아니라, 다음 번 거짓말의 태동이라는 것을. 눈동자 속에 자라는 미지의 생물. 그것이 처음 숨을 쉬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제자리로 돌아간다.

뒤늦게 깨달았다. 민재의 눈동자에 번진 것은 피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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