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단 한 번, 숨결처럼.
그러나 그 말은 끝이 아닌, 되돌림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안개 속 선고
"거기 서 있어."
안개 속에서 번쩍이는 작은 불빛이 내 눈을 찌른다. 검은 장갑 사이로 드러난 손끝은 차가워서, 아직도 내 볼을 스치는 듯하다.
나는 뒷걸음질 친다. 발밑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이글거리는 광맥처럼 귀를 때린다. 그가 다가온다. 숨결이 먼저 닿는다. 서늘한 공기 속에 녹아 있는 담배 향과, 아주 먼 곳에서 온 듯한 철쭉 향.
손이 멈칫 머문다. 내 눈동자를 향해 뻗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동시에 알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에게 멈춤을 요구하고 있음을.
침묵의 표식
길고 지루한 뉴스가 한때를 뒤덮던 날이 있었다. 몽타주 사진 속 그의 눈썹 곡선을 손끝으로 따라가던 날. 그날 이후 나는 그의 향기를 추적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스치는 서늘한 바람, 한밤중 공사장 철문 너머 새어나오는 담배 연기.
어둠 속에서 퍼지는 소문은 단순했다. 누군가는 되돌려진다. 아니, 놓아준다. 살아있는 몸으로,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그래서 우리는 불가침의 서약을 나눴다. 입술이 아닌 침묵으로.
흰 쪽지
지난 4월, ‘무명씨’라 불리던 여자가 집 앞에서 쓰러져 발견됐다. 그녀의 목덜미엔 V자 모양의 붉은 상처가 선명했다. 출혈은 없었다. 다만 하얀 쪽지 하나가 남았다.
너는 선택받았다
나는 그녀를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속삭였다.
"선택받았다고 해서 감사해야 하나? 아니. 그는 단지 내가 죽기를 포기한 걸 알아봤을 뿐이야. 그날, 난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그가 와서 확인해줬을 뿐."
그녀의 이마에 남은 흉터는 희미했지만, 눈에는 아직도 죽음의 실루엣이 박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흉터를 보고 울었다. 살아있는 몸의 흉터가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흉터였다.
모임
금요일마다 모이는 곳이 있다. 지하실 한구석, 불이 꺼진 채 남아 있는 술잔만 빛난다. 우리는 서로를 살아남은 자라 부른다. 말수는 줄었다. 누군가는 다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음에 다가갔다가 돌아온 뒤, 다시 죽음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나를 선택한 이유
나는 여전히 그날 밤의 눈빛을 꿈에서 본다. 나를 내려다보던 눈빛. 그 속에는 연민과 냉혹이 동시에 있었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 아니, 내가 선택받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그날, 내 안의 죽음을 모두 소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죽일 필요가 없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죽이고 싶은가.
아니, 무엇을 죽이지 못해 숨죽이고 있는가.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떤 차가운 손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