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만 쓰세요” 한마디에 2년이 사라진 순간

상담실에서 펜이 멈추는 순간, 치료는 끝났지만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당신도 모르게 그 펜을 쥐고 싶어질 것이다.

파워플레이침묵의심리상담실금기
“그만 쓰세요” 한마디에 2년이 사라진 순간

"그만 쓰세요, 선생님."

유리컵 너머로 내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수진 씨, 34세,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를 채워오던 그녀의 입술이 말라 있었다. 상담실 벽시계가 딸랑 소리를 냈고, 홍차 향이 식어갔다. 심리상담사 이준호는 펜을 놓았다. 잉크가 종이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가 퍼졌다. 그것으로 두 해가 닫혔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들어올린 목소리

나는 왜 그를 멈추게 하고 싶었을까. 왜 그 순간, 그가 써내려가는 모든 단어들이 내 것이 되길 바랐을까.

수진은 눈을 감았다. 그동안 쏟아낸 이야기들이 이준호의 수첩에만 존재했다. 유년의 상처, 실연의 맛, 직장에서의 무력감. 그 모든 것이 검정색 잉크 한 방울로 축소되는 순간을 그녀는 눈으로 찍어내며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그는 쓰고, 그녀는 지워진다.

"마지막으로 뭐라고 쓰려던 거예요?"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수첩을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그것은 끝이었다. 하지만 수진의 눈동자는 아직도 그 수첩을 향해 있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인 채 꼬옥 움켜쥐었다. 마치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종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듯이.


그녀의 욕망은 어디서 왔을까

어느 밤, 수진은 상담실 앞을 걸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 그날 쓰던 펜이 놓여 있었다. 몬테블랑 149. 검정색 목재, 황금 클립. 그는 늘 그 펜으로만 적었다. 그녀는 문득 상상했다. 만약 그 펜을 가지고 내가 그를 진단한다면?

이준호, 38세, 인간관계 회피 성향.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그녀는 웃었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주 수요일, 그녀는 다시 그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다음 주도. 그렇게 세 달이 흘렀다.


환자 H의 이야기

또 다른 상담실. 환자 H는 6개월째 한 가지 말만 반복했다.

"지난번에 뭐라고 썼어요?"

상담사는 미소 지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지 말아요."

H는 눈을 치떴다. 그날도 어김없이 상담사의 펜이 움직였다. H는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손에 든 게 뭐예요?"

상담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답했다. "그건 제 기록 도구예요."

H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게 제 이야기잖아요."

상담실은 조용했다. 에어컨 소리만 들렸다. 상담사는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H의 눈빛은 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서늘한 게 흘렀다. 그날 이후 H는 오지 않았다.


114페이지, 7번째 줄

우린 왜 상담사의 말보다 수첩에 적히지 않은 말들에 더 집착할까.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환자가 치료자의 권위에 반항하는 순간이 실제 치료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그건 너무 아름답게 포장된 설명이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되치기다. 상담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그가 우리를 어떻게 정의내리는지 알고 싶은 것.

수진은 아직도 꿈에서 그 펜을 본다. 검정색 몬테블랑이 서류 위로 미끄러지는 꿈. 그러나 이번엔 그녀가 쓰고 있다. 환자명: 이준호. 세션: 1. 증상: 과도한 관찰 욕구, 환자에 대한 미묘한 소유욕.

그녀는 깨어나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꿈꿨다.


왜 우리는 그 끝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할까

상담실은 미묘한 투기장이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의자, 같은 질문. 하지만 결코 같은 답이 없다. 상담사는 늘 적고, 환자는 점점 드러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상담사가 우리를 어떻게 볼까 궁리한다. 그는 나를 어린애로 보는가, 연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그냥 45분짜리 수입원으로 보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끝을 원한다. 하지만 끝은 늘 이렇게 온다. 펜이 멈추고, 문이 닫히고, 우리는 복도에 홀로 선다.


복도에서 마주친 시선

수진이 마지막으로 본 이준호의 눈빛은 무엇을 담고 있었을까. 연민, 안도, 아니면 희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는 전문가이니까. 그는 늘 한 걸음 물러서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도 몰랐다. 그날 이준호가 집에 돌아가서 수첩을 열어보았다는 것을. 마지막 페이지에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환자 K. 34세. 사실은 나더러 멈추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꿨다."

그는 그 페이지를 찢었다. 그리고 버렸다.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가 환자였고 수진이 치료사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상담실에서 뭘 빼앗기고 싶은가. 아니, 뭘 되찾고 싶은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당신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상담사의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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