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좀 닫아줘"와 그 이후
"너 진짜 지금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연진이 소리를 질렀다. 거실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20분 전만 해도 둘은 침대에서 서로를 탐하던 사이였다. 지금은 연진이 입에 맸던 그의 귀를 찌르는 말들이 독처럼 남아 있을 뿐.
"말이라도 해봐. 답답해서 미치겠어."
연진이 그의 팔을 잡았다. 승우는 살짝 뺐다. 그리고 느릿느릿 침실로 걸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그 소리가 연진의 가슴팍에 톱니바퀴를 박았다.
닫힌 문 너머의 몸짓
그날 밤, 연진은 거실 소파에 누워 생쥐처럼 숨을 죽였다. 침실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 뚜드득, 뚜드득. 목욕가운 벨트가 철제 침대프레임에 닿는 소리였다.
왜 난 이 소리를 알아챘을까. 왜 눈감으려 해도 그림이 그려질까.
연진은 그날을 기점으로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화해 섹스 대신 승우가 문을 닫는 순간을 기다렸다. 잠긴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 침대가 살짝 삐걱이는 소리. 그리고 금세 찾아오는 고요. 마치 운동 끝난 뒤의 휴식처럼.
실화처럼 들려주는 이야기 1. 유리의 두 번째 잔
유리는 29살, 광고회사 AE. 남자친구 민호와 3년째 사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좀 혼자 있게 해줘"였다. 어느 날은 이렇게 싸웠다.
유리: 너 왜 자꾸 내 친구한테 그래? 민정이가 불편하다고 했어.
민호: …
유리: 말해.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민호: (속으로) *왜 또 확대해석하지. 나는 그냥 말이 없을 뿐인데.*
민호는 그때부터 두 시간 동안 화장실에 머물렀다. 유리는 복도에 귀를 대고 들었다. 샤워기 물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숨이 차오르는 소리. 문고리 살짝 돌아가는 순간, 유리는 안경 너머로 민호의 손등에 붉은 자국을 봤다. 비누로 지워지지 않는.
그날부터 유리는 몰래 민호의 휴지통을 뒤졌다. 뭉쳐진 티슈, 그 안에 굳은 흰 얼룩. 민호가 유리와의 싸움을 혼자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실화처럼 들려주는 이야기 2. 혜지의 3분 47초
혜지는 대학원생, 남자친구 태현과는 연구실 동아리에서 만났다. 둘은 논문 주제로 하루에도 수십 번 부딪혔다.
혜지: 너 내 의견 무시하는 거 아니야?
태현: 근데 네 주장이 이론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혜지: 너도 그렇게 말하면 나 뭘 해?
태현은 그때마다 연구실 옆 창고로 사라졌다. 혜지가 어느 날 몰래 따라가 문 틈새로 보니, 태현은 스탠드 불빛 아래서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휴대폰 타이머가 3분 47초를 가리켰다. 딱 그 시간만큼이면 태현은 평온한 표정으로 연구실로 돌아왔다.
"내가 뭘 잘못했지. 미안, 더 들어볼게."
혜지는 그때 깨달았다. 태현이 그것으로 싸움의 용광로를 식힌 뒤, 비로소 대화를 재개한다는 걸.
우리는 왜 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나
싸움 직후 홀로 남는 남자의 모습은 왜 이토록 사각거리는 금기인가. 아마도 그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일 거다.
연인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내 몸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 그래서 흔들리는 건 나 혼자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감정 조절의 단독 작전'이라 부른다. 상대의 눈치를 안 보고, 대가 없이, 오직 내 심장만 빠르게 만드는 방법. 어릴 적 부모 앞에서 울음을 참았던 기억처럼.
여자들은 그 틈새를 목격하면서도
- 연민이 아닌 분노를 느낀다.
- 동시에 무언의 금지된 흥분을 느낀다.
- 왜냐하면 거기서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문 앞에 선 당신에게
오늘 밤, 연인이 화장실 문을 닫고 톱니바퀴 소리를 낸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해하려 손잡을 건가. 아니면 조용히 귀를 대고 그 혼자만의 전쟁을 엿들 것인가.
그리고 듣는 순간, 당신은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가 단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