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 첫 번째 단추를 풀다
민지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오래된 민트향 방향제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흙빛 조명 아래 그녀의 손가락이 셔츠 첫 단추를 풀 때, 태영은 아직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캔은 손에만 끼고 있었고, 그 안의 황금빛 액체가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두 번째 단추가 풀리자 태영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민지는 그가 지난주 새로 장만했다던 스피커를 향해 말했다. “음악 좀 틀어줘.” 그러나 태영은 리모컨을 만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캔 안의 진동을 더 세게 느낄 뿐이었다.
세 번째 단추가 풀릴 때였다. 민지가 속삭였다. “자기, 오늘은… 나도 준비됐어.”
그 순간, 태영의 시선이 식었다. 마치 끓던 물이 스위치 꺼진 전기포트처럼 급격히 잦아드는 것처럼. 그는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그냥 영화나 보자.”
민지의 손가락이 공중에 멈췄다. 브라 끈이 살짝 드러난 틈새로 보이는 살결은 초라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달아오르던 공기가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석 달째 이어진 만남에서 민지가 처음으로 먼저 손을 내민 날이었다.
수진, 드레스를 올리다
은행원 수진은 민수의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에서 풍기는 곰팡내를 맡았다. 민수는 문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씩씩거렸다. “에어컨 필터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수진은 TV 옆 선반에 걸린 미니어처 피규어들을 힐끗거렸다. 그중 하나는 이마가 깨져 있었다. 침대로 향하며 수진이 속삭였다. “나 오늘… 예민하네.”
민수는 대답 대신 냉장고를 열었다. 캔 맥주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고, 하나를 수진에게 밀어주었다. 캔뚜껜을 따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수진은 드레스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 어깨가 드러났다. 복사뼈 위로 희미하게 남은 자외선 자국이 검게 드러났다.
민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피했다. TV를 켜려 리모컨을 집어 들었지만, 전원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수진이 드레스를 다시 내려입을 때, 방 안은 맥주 캔의 탄산 소리만 요란했다.
다음 날, 수진은 은행 창구에서 하루 종일 눈물을 참았다. 모니터 화면 속 예금 잔고 숫자가 점점 흐릿해졌다.
은서, 셔츠를 벗다
회식 뒤풀이에서 눈이 맞았던 은서와 현우는 서로의 집이 아닌 모텔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서가 현우의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문을 열자 향 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초는 반쯤 탄 채로 잊혀 있었다.
은서는 현우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올렸다.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나… 오늘 괜찮아.”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젖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은서의 셔츠가 바닥에 떨어질 때, 현우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 세면대 수도물이 흐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현우가 나왔을 때 그의 셔츠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 오늘… 그냥 갈게. 머리 아파.”
현우가 나간 뒤, 은서는 침대 끝에 앉아 셔츠를 주웠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원했다. 그러나 원하는 순간이 오면, 원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진다.”
세 여자, 세 남자. 모두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도시에서 같은 맥빠짐을 맛보았다. 어떤 이는 뒤돌아섰고, 어떤 이는 연락을 끊었다. 어떤 이는 아프다고 했다. 모두가 도망쳤다.
심리학자들은 속삭인다. 남성의 성적 욕망은 사냥 본능의 연장선에 있다. 사냥꾼은 늘 사냥감보다 한 수 위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걸어 나오면, 사냥꾼은 사냥감이 된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이다. 초대장에 적힌 문장은 이렇다.
‘이제 너도 나에게 똑같이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자신의 민낯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차라리 싫은 척한다. 차라리 질색한다.
그들이 질색한 건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거울 속 자신의 초라함이었다. 여자가 벗는 순간, 남자는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으로 마주한다. 작고 초라한, 그래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자신을.
그래서 다음엔 누가 먼저 벗을까? 어쩌면 아무도 벗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