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우리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맞춘 그 순간, 도대체 뭘 원했던 걸까

데이트라는 말 하나 없이 눈 맞아 덮친 입술. 이름도 없던 그 욕망은 왜 지금도 혀끝에 아른거릴까. 아무 약속 없이 맺어진 은밀한 계약, 그리고 부르지 못한 이름 앞에서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것.

첫키스썸의끝이름없는욕망관계의시작금기의순간
우리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맞춘 그 순간, 도대체 뭘 원했던 걸까

아무 약속도 없던 목요일,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기다리던 너는 종이 한 장 넘기면서 말했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누군가 목젖 넘어가는 것 같아요.'

나는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냥 너의 손목을 잡아끌고 2층 계단 아래 비상구로 데려갔다. 희미한 초록색 안전등 아래, 너의 뒷목이 떨렸다. 이건 배신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니까. 아니, 되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너의 아래 입술을 세게 물었다. 너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또 감았다. 그때 네 손가락이 내 허리띠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는, 아니 봐도 상관없다는 듯이.


입술이 먼저 말했다

우리는 왜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서로를 탐했을까. '썸'이라는 말도, '데이트'라는 핑계도 없이 말이다.

만약 그때 그 입맞춤에 요즘 식으로 이름을 붙였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놓았을까, 아니면 더 깊이 물렸을까.

아무 약속 없이 벌어진 키스는 일종의 은밀한 계약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까운 사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맺어진 그 계약은, 말로 하면 깨질까 봐 더 세게 걸었다. 입술이, 손끝이, 숨결이 대신 서약했다.


연습장에 써내려간 네 개의 키스

2022년 3월, 홍대 앞 모임. 아직 새벽 1시였고, 민서는 그날 처음 본 준혁의 피어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담배 냄새 싫어해
그래서 끊었지

준혁은 대답 대신 민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 민서는 문득 혼잣말을 했다. 이건 실수일까, 아니면 시작일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로도 두 달간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냥 키스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민서가 준혁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잡으며 속삭였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준혁은 그때 처음으로 피어싱을 빼버렸다. "미안, 나는 그냥... 그때가 좋았어." 민서는 차가운 금속 맛이 입 안 가득했다. 그건 그의 미안함이었다.


다른 밤, 다른 너

같은 해 7월, 이태원 뒷골목 포장마차. 유진은 오랜 친구 도현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너 왜 자꾸 웃어?
아니 그냥... 생각나서

도현이 유진의 손에 술잔 아닌 자신의 손가락을 꽂았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빨았다. 소금기 섞인 손끝이었다. 그 순간,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산 하나로 둘이 들어가니까, 어깨가 부딪혔다. 누가 먼저였을까. 아마 동시였을 것이다. 눈 맞춤도, 입 맞춤도. 7년을 알았던 사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침에 유진은 도현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어제... 미안.]

유진은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마치 그 키스가 절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름 없음의 마력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일탈적 쾌감'이라 부른다. 이름 붙지 않은 관계, 혹은 아예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순간이 주는 짜릿함이다.

예전 연애의 상처를 꿰뚫은, 혹은 다가올 책임감을 무색케 하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구는 것. 그래서 더욱 탐닉하게 되는 것.

사실 우리가 원한 건 키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갈망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을 뿐.


혀끝에 남은 맛

그날 이후로 나는 서점 2층을 다시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올라가면 비상구 쪽에서 향긋한 종이 냄새가 난다.

그때 너의 머리카락 냄새였다. 아니, 너의 숨결이었다. 혹은 내가 원했던 어떤 것의 잔향이었을지도.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날을 회상한다. 데이트라는 말이 없었던 그날의 키스를. 아무도 우리를 부부가 아니라 부르지 않았던, 연인이라고도 하지 않았던.

그때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게 뭘까. 너의 입술, 아니면 그냥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채 끝나버릴 가능성이었을까.

그래서 너도 아직 그날을 떠올릴 때면, 혀끝에 아련한 금속 맛이 난다. 그건 우리의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그 욕망이 허공으로 사라지며 남긴 허탈이었을까.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