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날 밤, 냉장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 뒷문에 버려진 검은 봉투. 그 안에 담긴 침묵과 24년 뒤에도 차가운 공기처럼 남아 있는 엄마의 고백.

배신모성애침묵출생냉장고봉투
그날 밤, 냉장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해처럼 갈라진 다리 사이로 아기 머리가 빠져나온 순간, 수술실 조명이 눈앞을 하얗게 태웠다. 서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울이었다. 천장에 달린 거울이 열려 있었고, 그 속에서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가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붉은 기운 속에서 아기는 아직 눈도 뜨지 못했지만, 엄마의 시선은 이미 그 아이를 떠나고 있었다.

"…니가 나온 게 미안해."

순간, 마취가 풀리는 통증보다 날카로운 말이 뱃속으로 파고들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돌렸고, 의사는 실을 끊었다. 아기는 울지도 못한 채 공기에 노출됐다. 서영은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랑은 남의 몸에서 자신의 몸이 빠져나올 때 시작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몸이 남의 몸이 되는 순간 끝난다는 것을.


병원 뒷문에 검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벽 안개처럼 흐릿한 봉투는 아무 표식도 없었지만, 손끝이 닿으면 서리처럼 차가워졌다. 1999년 8월 14일 새벽 3시 42분, 봉투 안에는 서른두 시간 전까지 그녀의 어둠이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간호사 효진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검은 봉투를 들어 올릴 때, 그녀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담배 연기는 아기의 첫 숨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검은 봉투는 울지 않았다.

니가 내 안에 있던 동안 난 너를 원했다. 네가 나온 순간, 나는 너를 원하지 않았다.


스물한 살 민서는 엄마의 카톡 음성메시지를 들었다. 스피커에서 나온 숨소리는 아기 때의 목소리처럼 흐물흐물했다.

"…생각나? 99년 8월 14일 새벽?"

"왜 갑자기…"

"그때 내가 말했잖아. 이 아이 낳은 게 후회된다고…"

민서는 그날 밤 얇은 코트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가슴이 시려서 옷을 더 입을 수 없었다. 편의점 앞에서 만난 남자는 스물일곱이었다. 그는 민서의 눈에서 자기 엄마를 미워하는 흔적을 봤다고 말했다. 그날 밤, 민서는 엄마의 후회를 다섯 번 뱉어냈다. 남자의 몸 위에서, 민서는 검은 봉투를 열었다.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 자기 얼굴이 서 있었다.


2020년 겨울, 수진(41)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 한 권을 찾았다. 1980년 1월 5일.

오늘 아기가 태어났다. 눈이 너무 깊어서… 이 아이가 나의 죄를 다 아는 것 같아서 무서워. 내가 낳은 게 후회된다. 하늘이 내려준 천벌.

수진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엄마의 차는 40년째 그 자리에 있었다. 시동을 걸자, 엔진이 울었다. 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수진은 볼록 나온 배를 움켜쥐고 차를 몰았다. 붉은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치며,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엄마의 후회는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향해 그랬다.


2023년, 민서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뒷문에 검은 봉투는 사라졌다. 같은 자리에 새 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열자 차가운 공기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민서는 느꼈다. 열여덟 년 전, 자신이 태어난 그날 밤의 공기가 아직도 여기 있다는 걸.

그녀는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자기 얼굴이 보였다. 멈춘 숨결처럼, 눈동자가 서 있었다. 민서는 입을 벌렸다.

"니가 나온 순간, 나는 이미 너를 떠났어."

그 말은 봉투 안에 갇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