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WP와 서명한 그 순간, 나는 이혼이 아닌 무언가를 끝냈다

이혼 서류보다 더 날카로운 ‘WP 계약서’를 발견한 30대 주부 지수. 서명하는 순간, 그녀는 관계의 끝이 아닌 새로운 욕망의 시작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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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봉투 속의 날카로운 주머니칼

"빨간색 볼펜 아니면 무효니까, 새 거 찾아줘."

수원시 판교의 어느 법무사 사무실. 에어컨이 너무 세서 옷깃을 여미던 나는 남편인 ‘WP’의 손이 담배 냄새 날 듯 떨리는 걸 봤다. 우리는 그날, 혼인관계의 종료를 알리는 서류가 아니라 ‘우리 둘만의 비밀 계약서’ 서명을 마쳤다. 이혼은 그보다 3주 전에 이미 끝났다. 이건 달랐다. 이 서류는 이혼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문장 하나를 삭제하는 문서였다.


뒤틀린 연대의식

왜 사람들은 이혼 서류를 끝이라고 말할까. 나는 집요하게 그걸 믿지 않았다. 판사 앞에서 ‘각자의 삶을 존중합니다’라는 말을 주고받은 뒤에도 WP는 계속 내 집에 남았다. 우리는 침대를 나눠 쓰고, 냉장고를 나눠 쓰고, 키를 나눠 쓴다며 서로의 욕망을 다시 숨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를 숨기지 못했다.

“이건 혹시 네가 원하는 게 다 끝났다는 증거가 아니야. 네가 아직도 나를 원한다는 증거지.”

내가 속삭였다. WP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서명을 요구했다.


두 개의 진실

사례 1: 지수의 ‘위로금’ 계약서

31세, 전업주부 지수는 2년 전 남편의 외도를 접했다. 이혼 절차는 순탄했다. 남편은 미안하다며 재산의 절반을 양도했고,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남편이 집을 나서는 날, 지수는 법무사에게 다시 찾아가 새 계약서를 들고 왔다. 제목은 <위로금 및 관계유지 협정서>. 내용인즉, 남편은 매달 지수에게 150만 원씩 위로금을 지급하며, 동시에 지수의 신체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처음에 거절했다. 하지만 지수는 차분히 말했다.

내가 너한테 남은 게 뭔지 알아?
돈이나 마음이 아니라, 나를 아프게 한 죄책감뿐이야.
그 죄책감이 널 계속 내 곁에 묶어둘 거야.

남편은 결국 서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혼이라는 이름 아래, 더 치밀한 관계를 시작했다.

사례 2: 유리의 ‘안식’ 서약서

대기업 임원 유리(38)는 남편과의 이혼 후 ‘안식’ 서약서를 작성했다.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의 연락을 피하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 조항이었다. 그러나 이 서약서 뒤에는 숨겨진 부속계약이 붙어 있었다. 남편이 새로운 연인과의 결혼을 발표할 때마다 유리는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통지를 받는다는 조항이었다. 유리는 그 통지를 받을 때마다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가장 찬란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서약서는 결국 서로를 가두는 새 종류의 욕망을 만들어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침묵의 법칙

인간은 관계의 끝을 **‘끝났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끝을 부정한다. 실제로 끝나지 않는 감정, 끝나지 않는 육체적 기억, 끝나지 않는 분노와 미련은 서류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지막 서류를 만들어 끝을 가장한다. 그 서류는 관계의 종지부가 아니라, 관계의 연장 허가증이다. 서명이라는 공적 행위는 사적 집착을 정당화하는 연기가 된다.

심리학자들은 ‘종결 욕구(closure desire)’라 말하겠지만, 실은 우리는 결코 닫히길 원치 않는다. 서류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건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는 합법적 자기면죄부다.


너는 어떤 서명을 아직도 준비 중인가

WP는 서명을 마친 뒤 문을 나섰다. 나는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대신 책상 서랍을 열어, 아직 서명되지 않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제목란은 비어 있었다. 단지 서명란만 까만 잉크로 선명하게 비어 있었다.

당신 역시 아직 끝내지 못한 문장 하나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그 문장은 누구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서명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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