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67세 은행장, 23세 민아, 그리고 87장의 뒷모습

금고 깊숙이 잠겨 있던 카메라에 담긴 87장, 민아의 뒷모습. 누군가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어 지운 날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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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 은행장, 23세 민아, 그리고 87장의 뒷모습

202호 복도, 06:14

빨래 바구니가 카펫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아침 공기는 아직 밤의 칼날을 품고 있다.

나는 현관 거울 뒤로 몸을 숨긴다. 투과형 보안거울 너머로 흰 셔츠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젖은 옷감이 살에 달라붙는 윤곽, 단 한 뼘 노출된 허리의 결. 그 찰나가 하루를 뒤흔든다.

카메라 앱을 켠다. 화면 속 민아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셔츠 끝자락이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하얀 실크 끈 하나. 나는 숨을 꾹 삼킨다.

촬영 중지를 누르면 끝이다.

손가락은 굳는다.


엘리베이터, 06:18

도어가 닫히기 직전,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민아. 아침 향수 냄새가 먼저 다가온다. 나는 노트북 가방을 품에 꼭 누른다.

열 층. 디지털 숫자가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민아의 뒷머리가 흔들린다. 흰 목덜미 위로 살짝 내려앉은 머리카락 한 올.

"안녕하세요, 사장님."

문이 열리며 나지막이 건넨 인사.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그녀가 나간 뒤에도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제자리에 서 있다.


지하주차장, 06:26

검정 세단 안. 블랙박스 영상이 민아의 빨간 운동화를 잡는다. 발바닥이 땅을 박차는 순간, 카메라는 그 발뒤꿍치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지하 2층 끝자락, 하얀 코튼 팬츠 아래 드러나는 선. 87번째 스크린샷. 배터리 1%.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켜도, 차 안은 새벽의 차가움을 벗지 못한다. 손등의 푸른 정맥만 격렬하게 일렁인다.


은행장실, 09:00

책상 위 모니터. 3층 휴게실 CCTV에 잡힌 민아. 형광등 아래 떨어지는 빛이 그녀의 머리칼을 은빛으로 물들인다.

헤드셋을 끼고 볼륨을 올리지만, 잡음 너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대신 상상한다.

"민아 씨, 오늘도 짜장면이네요?"

"맛있어요. 언니도 한 입?"

나는 책상 아래로 손을 뻗는다. 더 이상의 묘사는 필요 없다. 민아의 웃음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곧 찾아오는 허전함을,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다.


퇴근길, 19:35

지하철 2호선 4번째 칸. 민아는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흔든다. Blinding Lights. 나도 같은 곡을 플레이한다.

한 칸 떨어진 거리, 민아의 뒷모습이 시야에 고정된다. 뒷좌석 남학생이 힐끗거린다. 순간, 나는 그 시선을 빼앗고 싶어진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민아를 봐선 안 된다는 오만한 생각.

당신은 어린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가.

그리고 그녀가 당신을 보며 무엇을 느낄지, 당신은 정말로 모르는가.


아파트 6층 계단참, 23:12

빨래 바구니가 카드를 긁는 소리. 문이 열리고 민아가 나타난다. 흰 셔츠, 투명하게 드러나는 브라렛 끈. 나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다.

민아가 고개를 돌린다. 처음으로 마주치는 눈빛. 나는 카메라를 내린다.

"사장님, 오늘도 찍으셨어요?"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민아가 다가와 내 손에 든 휴대전화를 가져간다. 잠금 화면이 넘어가며 87장의 사진이 차례로 사라진다.

"87장이네요. 역시 매일이에요."

한 장, 또 한 장. 마지막 사진이 삭제되자 민아는 휴대전화를 돌려준다. 빨래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내일은 88번째가 되지 않길 바래요."

문이 닫힌다. 복도는 적막에 잠긴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잠금 화면을 본다. 검은 화면 속, 67세 남자의 초라한 눈이 비친다.


복도 끝, 비상구 표시등만이 푸르게 빛난다. 나는 그 빛 아래에 서서 아직도 23세 민아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욕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여자의 뒷모습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젊음의 잔해라서. 67세 남자는 이제 그 뒷모습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 뒷모습 속 민아가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이미 그녀의 뒷모습에 갇혀 버렸다. 문 앞에서 내뱉은 한 마디, "내일은 88번째가 되지 않길 바래요"라는 말이 복도에 맴돈다.

나는 아직도 그곳에 선다. 빨래 바구니 소리가 다시 들릴까, 아니면 영원히 들리지 않을까. 민아의 뒷모습은 사라졌지만, 나의 욕망은 푸른 비상구 불빛 아래 남아 숨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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