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님, 오늘도 그날 밤 하실래요?”
2002년 5월, 축제 뒤편 잔디밭.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술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깔린 밤.
박준오가 병따개로 맥주를 따며 소리쳤다.
“야, 형들 봐봐. 저 여자, 작년에 내가 재밌게 놀아줬다는데 아직도 날 좋아해. 미친년이지?”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죄다 웃었다. 손에 든 소주병이 떨렸다. 플라스틱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 맥주 거품이 넘쳐 흐르는 소리, 누군가 휴대전화로 사진 찍는 ‘찰칵’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박준오는 팔짱을 끼고 나를 힐끗 보았다. 눈빛이 말했다.
‘너,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웃을 거야.’
나는 웃지 않았지만, 그게 더 웃겼다.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번쩍일 때마다 그날 밤의 일이 한 장씩 찍혔다.
Why So Serious?
그들이 원하는 건 과연 웃음이었을까? 아니면 내 반응이었을까? 내 눈동자에 떠오르는 공포,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긴장감.
그날의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건 조용한 살인이었다. 목소리로, 웃음으로, “장난이야”라는 말 한마디로.
그들이 웃을 때, 실제로 움직이는 건 공포였다. *"너도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공포. 그래서 그들은 웃었다. 단지 자신들이 아니라는 안도감으로.
그들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나는 그날 밤을 다시 삼켰다.
두 번째 이야기: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농담
2020년, 화상 회의. “김서연이 씨, 말씀 좀 하시죠.”
화면 속 최영재 팀장이 말했다. 그는 박준오와 나이가 비슷했다. 똑같은 눈빛, 똑같은 미소.
“저... 작년에 제가 성희롱 교육 때 했던 발표 기억나시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네, 팀장님. 그때 제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일을 예로 들었는데...”
최영재가 미소 지으며 끊었다.
“아, 그날 밤 얘기요? 작년엔 정말 열정적이셨죠. 혹시 그 선배분이랑 아직도 연락하세요?”
화면 속 동료들이 피식 웃었다.
최영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눈가가 좁혀지며 악랄한 궁금증이 번쩍였다.
‘아직도 그날 밤에 묶여있구나.’
그의 눈빛이 말했다. 2020년, 18년이 지났다. 나는 웃지 않았다. 괜찮은 척했다.
농담의 반감기
그날 밤은 방사능이었다.
- 첫 1년: “아 그냥 농담이잖아”
- 5년: “아직도 그거 가지고?”
- 10년: “이제 좀 넘어가자”
- 22년: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사람들은 말했다. “그게 무슨 대수냐”고. 그러나 그 ‘무슨 대수냐’는 내 몸에서 살아 숨 쉰다.
지하철에서 누가 웃을 때마다. 회식 자리에서 누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다. 2002년 5월, 술 냄새 젖은 잔디밭.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나는 그날 밤을 지웠다. 지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몸에 새겨졌다. 그날 밤, 그 말, 그 웃음.
지하철에서 누가 웃으면 나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회식 자리에서 누가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
22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날 밤, 그 말, 그 웃음이 나를 여기에 세워놓았다.
마지막 질문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웃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웃음 속에서 22년째 죽어가고 있다.
당신은 과연 언제까지 그 웃음을, 그리고 그 죽음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