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7분, 준호는 민지 손에 쥐어진 투명 봉지를 들여다봤다. 분홍색 알약이 세 알. 민지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듯 가볍게 준호의 손등을 두드렸다.
"오늘은 하나만."
준호가 눈을 흘긋 올리자 민지는 웃었다. 그 웃음은 수증기처럼 퍼져 방 전체를 데웠다. 준호는 알약을 혀 위에 올려놓고 삼켰다. 30분쯤 지나 눈빛이 흐려졌다. 민지는 그 틈에 준호의 휴대폰을 꺼냈다. 수신 메시지·삭제된 통화 기록·갤러리의 최근 삭제 항목. 모두 한두 번의 터치로 드러났다.
준호는 아침마다 머릿속이 솜털처럼 퍼져 있음을 느꼈다. 어젯밤의 테두리가 모두 사라진 채. 민지는 미역국을 끓이며 말했다.
"술 너무 마셔서 그래. 내 탓이야."
준호는 민지가 눈시울을 붉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는 알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잊었다.
민지는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 러시아에서 제조된 ‘특별한’ 알약. 정식 의약품이 아니라 부작용도 보고되지 않았다. 7개월 전, 친구 생일 파티에서 만난 준호는 조용하고 다정했다. 그러나 민지는 우연히 준호의 휴대폰을 열어봤다. 다른 여자들과 나눈 대화, ‘굳이 민지한테 말 안 해도 될 것 같아’라는 문장이 화면에 박혔다. 그날 이후 민지는 준호를 관리하기로 결심했다. 일정을 파악하고, 만나는 사람을 추적하고, 휴대폰을 열어보기 위해 알약을 선택했다.
민지의 룸메이트 수진도 같은 알약을 받았다. 매일 아침 ‘스트레스 해소제’라는 이름으로. "요즘 너무 예민해져서. 이거 먹으면 좀 진정돼." 3주째, 수진은 아침이면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민지의 서랍을 열어본 그날, 수진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메모를 읽었다.
1알 = 졸림, 2알 = 무기력, 공복에 복용 시 효과 ↑
수진은 알약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렸다. 그러나 민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조차 숨쉬기 어려웠다. 수진은 민지의 표정 하나에도 전전긍긍했다.
준호는 점차 민지 없이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잠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민지는 준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됐고, 준호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 믿었다. 민지는 준호와 수진을 지배하는 순간 자신이 소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상대가 나를 선택하는 감정이지만, 지배는 상대가 나를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 밤도 민지는 준호에게 알약 두 알을 건넨다. 준호의 휴대폰엔 새로 추가된 연락처가 있다. 민지가 화면을 확인하며 속삭인다.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못 해. 그렇지?"
준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민지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그는 상상할 수 없다. 혀끝에 남은 단맛은 사랑보다 짙고, 지배보다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