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말이 얼기 시작한 새벽 12:16
12:16 a.m. 은서는 블루하와이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3초를 셌다. 1, 2, 3—삼켰을 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은 뜨거웠지만 체온은 35.4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톡방 하나가 시커멓게 떴다가 하얗게 번쩍였다.
준혁 12:08
나 지금 손님들이랑 있어. 그냥 동네 아는 동생이야.
준혁 12:08
진짜 친한 애 아니야, 은서야.
아는 동생—그 새끼랑 지난주에도 침대 흔들어 깨뜨린 장면이 눈앞에서 되감겼다. 은서는 한동안 손가락이 꿈틀거리지 않았다. 차가운 척해봤자 뼛속까지 얼어버릴 뿐이고, 이 새끼는 그걸 모르지.
유리 같은 거짓말, 유리보다 날카로운 껍질
차가운 척은 유리를 깨물 때처럼 혀가 찢긴다. 겉보기엔 투명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한 번 틈이 가면 온몸으로 퍼지는 균열이 남는다.
‘괜찮아, 나도 다른 사람이랑 있어.’
두 번째 거짓말이 나올 때쯤, 삼키는 것은 얼음이 아니라 유리 가루였다. 살을 스치는 매끄러움이 곧 피를 흘리게 하는 날카로움으로 돌변했다.
Case 1. 주희, 29세 — 숯불 위의 춤
회식 장소, 숯불 냄새가 코 끝을 간질인다.
- 상무 (와인 한 병을 들고) : "주희 씨, 오늘은 한 잔 하죠?"
- 주희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슬쩍 밀어낸다) : "괜찮아요, 저 구경만 할게요."
- 상무 (눈썹을 치켜올리며 한 걸음 앞으로) : "도도하네요. 흥미롭습니다."
주희는 숯불 냄새가 코에 달라붙는 걸 견뎠다. 옆에서 동료들이 웃음소리를 터뜨릴 때, 그녀는 눈에 들어오는 불빛마저도 느슨하게 받아들였다.
2주 후, 회사 복도.
- 동기 : "상무가 주희 씨 자리 옆에 또 앉고 싶어 한대요?"
- 주희 (어깨를 으쓱하며) : "글쎄요, 누가 봐도 저는 차갑잖아요."
그 말이 나온 순간, 그녀의 미소에 서리가 낀다. —그렇게 ‘차가운 여자’라는 껍질이 굳어 버렸다.
Case 2. 도현, 32세 — 시차 두고 떨어지는 말
도현은 전략을 짰다. 연락은 하루에 한 번, 답장은 3시간 뒤. ‘지금은 바빠서’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입력했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첫 달, 뜨거운 반응.
- 여자1 :
도현 씨 오늘 뭐 해? 보고 싶어. - 도현 (3시간 뒤) :
미안, 오늘은 회의 밀려서. 너무 늦을 것 같아.
두 번째 달, 떨어지는 온도.
- 여자2 :
도현 씨, 진짜 바쁜 거야? 아니면 나랑 만나기 싫은 거야? - 도현 (5시간 뒤) :
바빠서 그래. 다음에 꼭 만나자.
세 번째 달, 얼음장 톡방.
여자1 :
도현아, 뭐야? 대답이라도 해줘.
여자2 :나도 미안해? 그럼 나도 그만 둘게.
여자3 :싫은 거면 그냥 말해줘.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도현은 그들에게서 마지막 온기마저 끌어당기지 못했다. 이미 ‘차가운 남자’로 굳어버린 그는, 아무도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영하 5도, 발가락부터 녹이기
차가운 척은 처음엔 방패였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얼어버리는 방패. 하지만 얼음은 두꺼워질수록 민감해진다. 더 얇아진 겉면은 스치기만 해도 금이 간다.
보통 얼음은 불로 녹인다. 하지만 너무 오래 얼어 버리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타버린다.
12:23 a.m., 은서의 마지막 톡방
은서는 눈동자를 굳혔다가, 천천히 톡방에 들어갔다. 손가락이 떨리는 걸 숨기려고 두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은서 12:23
준혁아, 나 지금 혼자야.
너랑 그 새끼가 떡 친 거 봤어.
그래도 아직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게 나인데.
이건 차가운 척이 아니라, 진짜로 얼어버린 거야.
근데 이제 녹을래.
네가 오지 않아도, 나 혼자서도 녹을래.
은서는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메시지는 초록색 입력창 속에 그대로 남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발가락부터 차례로 체온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는 건 불도, 누군가의 온기도 아니었다. 그냥 차가운 척을 그만두는 순간, 방 안이 0˚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