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요, 이 시계 좀 봐줄 수 있나요?"
그녀의 가슴 위에 놓인 시계는 너무 낯설었다. 가죽 밴드는 이미 닳아 있고, 다이얼엔 미세한 흠집이 있었다. 나는 그 시계를 4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내가 선물한 실버 브레이슬릿만 차고 다녔다.
숨겨진 초침 소리
시계는 살아 있었다. 가죽 밴드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향기. 낯선 남성의 향기였다. 그 향은 내가 아는 그녀의 방향 냄새와는 달랐다. 더 날카롭고, 더 짙었다. 시계를 들어 올리는 순간, 뒷면에 새겨진 글씨가 내 눈을 찔렀다.
To my dearest M. Forever yours, J.
M은 그녀의 이름. 하지만 J는 누구인가. 나는 4년 동안 그녀의 상사를 포함해 J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단 한 명도 들은 적이 없었다.
사무실의 뒷모습
김민지는 28세,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였다. 그녀는 늘 늦게까지 일한다고 했다.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다고, 편집 회의가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늘 지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고, 정장 차림에 하이힐은 늘 발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핸드폰 속 갤러리를 우연히 들여다본 날, 나는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찍은 사진들. 그 중 한 장엔 그녀가 회의실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옆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사진은 흔들려 있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분명했다. 그녀가 말하던 상사, 박재현 부장.
"오늘도 늦게 들어갈래. 재현이랑 술 좀 마시고."
그녀는 말했다. 재현이랑.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시계 뒷면에 새겨진 J와 겹쳤다.
타인의 욕망 위에 선 나
사람은 왜 금기를 범하며, 왜 남의 것을 탐내는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욕망이란 결핍에서 온다고. 하지만 나는 보았다. 김민지의 눈에서 오히려 넘쳐나는 욕망을. 그녀는 결핍보다는 과잉을 안고 있었다. 과잉의 시간, 과잉의 관심, 과잉의 감정.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도 사랑하고 있어. 이게 가능한 걸까?
그녀가 한밤중에 던진 질문은 욕망의 본질을 드러냈다. 사랑이란 단순히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그리고 그 복잡함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남의 방에서 들린 소리
이준호는 32세, 김민지의 동료였다. 그는 나에게 한 번의 늦은 밤, 회사 연차 송년회 뒤에 목격한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날 회식 끝나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민지가 재현 부장이랑 같이 나오더라고요. 둘이 같은 방향이라고 해서 먼저 택시를 탔거든요. 그런데요..."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택시 안에서 둘이... 민지가 재현 부장의 목을 안고 있었어요. 그리고... 입을 맞추고 있었죠. 창밖으로 보였어요.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어요."
그날 이후, 나는 김민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도 다른 남자의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의 가슴 위에 놓인 시계를 발견했을 때, 나는 알았다. 그날 송년회 이후, 그녀는 계속해서 그 시계를 차고 다녔다는 걸.
금기의 달콤함
왜 우리는 누군가의 것을 탐낼까. 왜 우리는 금기를 범하려는가. 심리학자 에스테르 페렐은 말한다. 금기란 욕망의 불쏘시개라고. 금기가 있을 때 욕망은 더 뜨거워진다.
김민지는 나에게 금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의 금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 금기의 경계를 넘는 순간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사랑은 경쟁이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두 남자를 비교하는 미묘한 계산을. 더 뜨거운 쪽을, 더 금기적인 쪽을 선택하는 눈빛을.
마지막 초침
나는 시계를 들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시계의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초침은 4년 동안 나를 속여온 시간을 하나씩 세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들고 욕실로 갔다. 거울 앞에 서서 시계를 쥐고 있었다.
이제 너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야.
나는 속삭였다. 시계의 가죽 밴드를 자르고, 다이얼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돌아와 침대 옆에 앉았다. 김민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가슴 위엔 이제 시계 대신 내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물었다. 4년 동안 나를 속인 그 시간, 그 욕망, 그 금기의 순간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하지만 정답은 없었다. 다만 시계의 초침이 멈춘 순간, 나는 알았다. 나 역시 그녀에게 금기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당신은 이 순간, 누군가의 시계를 차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누군가의 몸 위에 당신의 시계를 놓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