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35년 부부, ‘아프다’ 한마디에 다시 붙잡히는 순간

결혼 35년 차, ‘아프다’는 고백은 복수이자 간청이다. 상처를 빌미로 다시 붙잡고 싶은 욕망, 그 뜨거운 침묵의 순간들.

결혼35년상처의욕망부부심리침묵의배신욕망의고백
35년 부부, ‘아프다’ 한마디에 다시 붙잡히는 순간

"아직도 아프다." 그 말이 식탁 위에 떨어진 건 그녀가 63번째 생일 아침이었다. 해바라기 향이 진한 미역국이 식어가는 동안, 남편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35년간 들어왔던 말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녀는 왼쪽 가슴이 아프다고 했는데, 실은 1989년 7월 12일 새벽에 느꼈던 그 통증을 말한 거였다. 남편이 처음 바람났던 날.


피멍 든 기억이 다시 손을 내밀 때

이제 말하면 뭐해, 싸우기도 지겨운데.

그런데 왜 입이 떨려지지?

결혼생활이 길수록 상처는 파스처럼 돼버린다. 붙이면서도 속은 썩어가니까. 그런데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어쩐지 숨겨왗던 욕망이 슬슬 드러난다.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상대는 책임져야 하니까. 그 책임 = 다시 나를 바라봐 달라는 으깬 애원.

심지어 이건 둘의 비밀 언어였다. 싸우다 말고, 섹스도 끝내고, 아무 말 없이 잠들기 직전. "여기 아프다." 그 한마디면 남편은 가슴 한쪽을 어루만리며 미안하다고 속살거렸다. 미안함이 곧 뜨거움으로 변하는 과정. 35년 동안 딱 두 번 눈 맞았던 날도, 이 말로 시작했다.


진주처럼 굳은 거짓말들

사례 하나. ‘정숙’(68) 씨는 며칠 전 남펴 ‘병호’(70) 씨에게 고백했다. 오른쪽 어깨가 찢어진다고. 실은 아팠던 게 아니었다. 단지 지난번 아들 결혼식 때, 시어머니 옆에 앉아 있던 병호가 처제 허리를 훅 감쌌던 장면이 뇌리에서 꺼지지 않았던 것. 그녀는 8년 만에 "어깨 아프다" 를 꺼냈다.

정숙: 오늘은 진짜 아픈 거 같아.
병호: 어디? 어깨? 안마해줄까?
*그 순간, 정숙은 8년 전 그날을 처음부터 다시 살았다.*
*처제의 파스 냄새, 시어머니의 지지직 향내, 병호의 반창고 냄새.*

그러나 병호는 기억 못했다. 그냥 어깨를 주무르고, 이마에 입 맞추며 잘잤다. 정숙은 눈을 감고, 그래도 되는 거냐 를 속으로 되씹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더 크게 아프길 바랐다. 병호가 무릎 꿇고 울며 사죄하는 꿈을.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허리 디스크까지 꾸며서 들고 나왔다.

또 다른 사례. ‘민재’(62)와 ‘선영’(60) 부부는 35주년 해외여행 중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 식당. 와인 한 병을 거의 비우고, 선영이 웃으며 말했다.

선영: 여기 와서도 똑같네.
민재: 뭐가?
선영: 그때랑. 네가 학생 때 만났던 애랑 여기 왔었다잖아.

민재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1984년 여름, 20대 초반의 민재는 비행기까지 타고 선영에게 실수를 고백했다. 그때도 여기였다. 선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민재는 40년 이상 입 밖으로 낸 적 없는데. 선영은 다만 미소를 지으며 손등을 어루만졌다.

선영: 아프지? 내가. 여기, 가슴 한복판이.

그날 밤 민재는 선영의 발등에 입 맞추며 잠들었다. 그녀가 옆에서 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울면서도 민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선영의 손은 뜨거웠다.


왜 우리는 아픔을 환호하는가

아프다는 말은 가장 은밀한 복수다. 동시에 가장 은밀한 간청이기도. 상대를 범죄자로 만들고, 자신은 피해자로 세워놓는 마법의 한마디. 그리고 그 마법은 오직 부부만이 통한다. 35년간 겹겹이 쌓인 속마음은, 아픔으로 말해야만 뒤집힌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오래된 부부가 서로를 괴롭히는 방식은, 사실은 가장 가까이 머물고 싶은 욕망의 반전이라고. 아프다는 고백은, 또르륵 열리는 문이다. 상대가 문을 열어주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둘만의 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 혹은 문을 닫아버리면, 끝까지 파고들어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도.

그래서 35년차 부부는 아직도 이 말을 한다. "아프다." 그 말 한마디에, 남은 목숨이 걸렸다는 걸 둘 다 안다. 그래서 그 말은, 사랑의 반어다. 내가 너를 아직도 붙들고 싶다는 뜻.


마지막으로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에게 "아직도 아프다" 고 말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 말을 들으면서도 모르는 척 살고 싶은가. 둘 중 어느 쪽이든, 당신은 이미 35년의 불길 속에 서 있다.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