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 계단참. 여섯 평 남짓한 콘크리트 공간이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품고 있다. 등화 두 개만 살아 있어 그림자가 한 덩어리로 내려앉는다.
네가 서 있는 곳은 3층과 4층 사이, 남들이 눈을 피해 지나치는 숨은 각도. 벽에 기댄 어깨가 차가워진다. 2시 47분. 90일째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기다린다. 손에 든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가 한 번 쥐었다 놓은 문 손잡이. 철제는 아직도 미세한 체온을 기억한다.
여기서 들키면 끝이야.
그래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아.
숨이 닿는 한 칸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린다. 운동화 고무창이 콘크리트를 비비는 마찰음. 네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가슴 안쪽에서 쿵쾅이는 건 익숙한 리듬. 빨라지는 맥박이 머릿속으로 치솟는 혈압을 재며, 네 몸이 굳는다. 문 손잡이를 움켜쥔 손가락이 떨린다. 네가 입을 벌리면 나올 말은 아무것도 없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수록 복도 끝 공기는 더 건조해진다. 혀끝이 메말라 붙는다.
괜찮아, 이번엔 분명… 라는 속삭임도 목끝에 걸려 떨어지지 않는다. 네 등뒤로는 이미 오래된 CCTV가 붉은 불빛을 깜빡인다. 녹화중. 그렇다, 네가 서 있는 이 계단참은 늘 남의 눈에 찍힌다. 그럼에도 네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건, 눈을 피해야만 더 선명해지는 금기 때문이다.
2월 14일, 혹은 첫 맛 첫날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오후 6시 약속, 그는 오지 않았다. 네가 기다린 건 초콜릿 통조각도, 꽃다발도 아니었다. 그가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맡을 법한 차가운 바람이었고, 잠시 후 현관문을 열 때 쿵 하고 울릴 법한 열쇠 소리였다.
오후 9시 20분, 네가 그의 집 앞 복도에 도착했을 때 운동화 한 켤레가 젖어 있었다. 까만 가죽에 빗물이 번들거렸다. 네가 손끝으로 만져보니 아직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그날 비는 오후 7시쯤 그쳤다. 그러니까 그 운동화는 누군가와 같이 비를 맞았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부터, 네 기다림은 집요해졌다.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복도 끝 계단참은 네가 고른 최적의 포지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는 발걸음을 미리 가려낼 수 있고, 그가 문을 열 때 옆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다.
당신은 CCTV 영상을 샀다. 편의점 알바에게 돈을 쥐어주며 ‘그 남자’가 나오는 시간대만 골라 받았다. 87개 파일. 총 12기가. 네 맥북 어두운 화면에 떠오는 그의 뒷모습은 늘 1시 40분경이었다.
불확실성의 미끌림 심리학 서적은 말한다. 불확실성 보상이라는 낱말로. 보상이 확률적으로 주어질수록 뇌의 도파민 회로는 격렬해진다. 그가 올까 말까, 문이 열릴까 닫힐까. 50:50의 확률이 네 몸을 개처럼 물어 뜯는다.
당신은 이미 안다. 그가 늦는 이유를, 운동화가 젖은 이유를, CCTV 속 여자 손을 끌고 들어가는 이유를. 알면서도 네 발은 계단참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알아채는 순간 게임이 끝나버리니까.
네가 기다리는 건 그가 아니다. 네가 기다리는 건 ‘기다림’ 그 자체다. 매일 새벽 2시 47분, 네 몸이 떨리는 정도를 측정하는 일. 혈압계 없이도 네가 얼마나 더 깊이 떨어질 수 있는지 실험하는 일. 그 끝에서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일.
연애가 아니라 자기 파괴의 연속이다.
떨림, 그리고 문 손잡이 오늘도 복도 끝이 흔들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동시에 네 무릎이 꺾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목끝까지 차오른 공기가 폴대로 내려가면서 가슴을 울린다. 손목 맥박이 초당 세 번.
네가 문 손잡이를 움켜쥔다. 철제는 이제 완전히 차가워졌지만, 네 손끝만큼은 뜨겁다. 발걸음이 다가온다. 똑같은 운동화 고무창, 똑같은 리듬.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다르다. 발걸음이 하나 더 붙는다. 여자 하이힐 끝이 콘크리트를 찍는 소리.
두 사람이 멈춘다.
열쇠가 꽂히는 소리. 문이 열린다. 닫힌다. 복도 위로 조용해진다. 네가 숨을 내쉬는 동안 눈앞이 흐려진다. 문 손잡이를 놓지 못한다. 오늘도 실패다. 그래도 네 발은 계단참을 떠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