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10년 연인이 내민 '6개월 프리패스' 계약서, 서명할 용기 있나

10년째 찬물이 된 침대 위, 연인이 내민 계약서. 서로 다른 몸을 6개월 동안 탐험할 권리를 부여한다면, 과연 사랑은 살아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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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연인이 내민 '6개월 프리패스' 계약서, 서명할 용기 있나

"여기, 도장만 찍으면 돼"

서랍 안에서 꺼낸 A4 한 장이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유리는 먼저 남자 이름을 적어놓고 시작했다. 최소한의 휴식, 최대한의 탐닉. 작고 반듯한 글씨로 적힌 6항목. 가장 윗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2025년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상호 동의 하에 제3자와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유리의 손가락 끝에 묻은 네일 스티커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10년 만에 처음 바꾼 새빨간 컬러였다. 그녀는 펜을 테이블에 굴렸다.

"한 명씩만 골라. 근데 누군지 말할 필요는 없어."


갈증의 냄새

그들은 알았다. 서로의 몸에 더는 길이 없다는 걸. 손끝이 닿아도 반응이 오지 않는 지점들이 늘어났다. 유리는 샤워할 때마다 ‘이미 다 본 것’이라는 문장이 거울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지훈은 유리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다가 문득 ‘아, 이건 분명 엄마 냄새였지’ 하고 뒷목이 서늘해지곤 했다.

계약서는 그 갈증의 맛을 단번에 건드렸다. 새로운 살결, 새로운 숨소리, 새로운 경계. 10년 동안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처음’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치지 못했다. 연필을 든 손이 살짝 떨렸다.

나는 네가 누굴 가질지 상상하는 순간부터 이미 너를 잃어버렸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7월, 지훈의 방

지훈은 회사 신입사원 혜진과 첫 번째 키스를 나눴다. 회식 자리에서, 평소 눈치 하나 없던 선배가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야, 요즘 우리 팀 지훈이 좀 이상해. 뭔가 환하게 타오르는 느낌?"

혜진은 화장실로 따라 들어왔다. 둘은 입 안으로 서로의 혀를 밀어넣으며 숨을 짧게 끊었다. 지훈은 손등으로 유리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밥 먹었어? 나는 아직.’

그날 밤, 유리는 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베개에 묻은 지훈의 머리 냄새보다, 혜진의 립글로스 향이 먼저 떠올랐다.


8월, 유리의 거실

유리는 고등학교 동창 민수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혼 2년 차, 아이 하나를 둔 싱글대디였다. 예전처럼 담배를 피우려는 민수의 손을 잡았다.

"여기선 금연이야."

민수는 웃으며 담배를 내려놓고 유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들은 소파에 누워 서로의 옷 단추를 한 개씩 풀었다. 유리는 지훈이 입고 있던 청바지와 똑같은 색의 청바지를 민수에게 벗겼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9월, 공동 계좌

여행 자금으로 모아둔 500만 원이 6개월 만에 반토막이 났다. 숙박비, 선물비, 미안함. 지훈은 유리 몰래 혜진에게 70만 원짜리 가방을 샀다. 유리는 민수의 아이 돌잔치에 축의금 100만 원을 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지출 내역을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은행 앱 푸시 알림만 꺼두면 끝.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둘은 남몰래 서로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지훈은 유리와 민수의 늦은 밤 통화 기록 28건을 발견했다. 유리는 혜진이 보낸 ‘오늘 밤도 생각나’라는 메시지를 보았다. 그때부터 집 안에선 ‘사과’라는 말이 사라졌다.


욕망의 그림자는 왜 우리를 비추는가

심리학자들은 이를 ‘다음 단계 불안’이라 부른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길어서 미래가 다 보인다. 결혼, 출산, 육아, 이혼, 노후. 한 치 앞도 모르는 ‘새로운 육체’는 그 불안을 단번에 날려버릴 마법 같은 약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새로운 살결은 결국 낯선 냄새로 남고, 익숙한 손길은 언젠가 다시 그리워진다는 걸. 그래서 계약이 끝나는 날, 두 사람은 서로의 품에 안겨 울었다. 유리는 지훈의 가슴에 귀를 대고 말했다.

"니가 누굴 만났는지는 몰라도, 니가 나를 떠났다는 건 알겠더라."


계약서 끝자락

12월 31일 밤, 유리와 지훈은 계약서를 다시 꺼냈다. 둘은 펜을 들고 각자의 이름 위에 큰 X를 그었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유리는 민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지우지 못했다. 지훈은 혜진의 생일 선물을 아직 옷장에 숨겨두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6개월 후에도 같은 침대에 누워 ‘그래도 너만큼은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차라리 새 계약서를 들고 ‘이번엔 1년으로 해볼까?’라고 웃으며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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