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금요일. 이태원 모퉁이 와인바에서 나는 처음 본 여자의 옆에 섰다. 그녀는 긴 코트를 벗으며 목 뒤를 어루만지는데, 갑자기 온 방의 남자들이 시계추처럼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잔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누군가는 재킷 단추를 꿰매다 말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갑자기 시험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너는 정말 그녀를 원하는 게 아니야
남자들은 침묵으로 서로를 재단한다. 너, 얼마나 견딜 수 있어? 시선은 이렇게 묻는다.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릴 때, 혹은 와인 향을 맡으며 눈을 감는 순간. 그 찰나를 누가 먼저 놓칠까? 어깨 너머로 보는 시선의 각도, 발끝이 향하는 방향, 심지어 숨 쉬는 횟수까지.
우리는 그녀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통해 다른 남자들을 지배하고 싶었을 뿐. 내가 이 공간의 실세라는 걸 너희에게 각인시키고 싶어. 여자는 단지 증거일 뿐이야.
민재와 경준의 밤
민재는 내가 회사 동아리에서 처음 본 남자였다. 그날도 그녀, 수진이 있었다. 3층 테라스에서 수진은 담배를 피우며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재가 먼저 옆에 섰다. 그리고 나도 다가갔다.
여기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수진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재와 나는 시선을 마주쳤다. 그것은 0.1초의 전쟁이었다. 민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수진은 우리 사이를 오가며 웃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두 남자가 자신이 아닌 서로를 향해 견제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녀는 더욱 천천히 담배를 뿜었다. 연기가 우리 사이를 가르는 동안, 민재는 조용히 질책했다.
너는 여기서 뭘 하냐. 니가 올 자리가 아니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진에게 건넨 와인잔을 민재가 건드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나 수진은 내 잔을 들었다. 민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싸움에서 이미 한 명은 패배했음을.
다시, 살아 있는 증거
한 달 뒤, 나는 다시 그녀의 옆에 섰다. 이번에는 강남의 재즈바. 다른 여자, 하은이었다. 역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번엔 좀 달랐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먼저 와있었다. 준상이라는 친구였다.
준상은 먼저 와서 하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가오자 말을 멈췄다. 하은은 눈치를 챘다. 준상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결이 달랐다. 이번엔 네 차례가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하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우리 사이를 번갈아 보다가, 준상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준상의 미소가 굳었다. 하은은 내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우리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할지 몰라서, 둘 다 보내려 했거든요.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가 우리를 통해 다른 남자를 지배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었던 거다. 하은은 단지 살아 있는 증거였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사각거리는 맹수들이었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들은 이를 '표적 전이'라 부른다. 원래는 여자에게 갖는 욕망이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남자에게로 돌린다. 나는 너를 이겼다. 이 승리가 더 달콤하다. 여자는 소모품일 뿐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출생부터 남성 군집에서 경쟁해왔다. 유아원에서 장난감 경쟁, 학교에서 성적 경쟁, 직장에서 승진 경쟁. 여자는 단지 또 다른 경쟁의 장일 뿐이다. 그녀를 차지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침묵은 완벽한 무기다.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그저 존재감만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그 순간 우리는 여성이 아닌 서로의 남성성을 시험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서 있는가
오늘 밤, 당신이 그녀의 옆에 선다면. 그녀가 아닌, 그 방의 다른 남자들을 위해 서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기 전, 누구를 먼저 확인하려 드는가? 그리고 그녀가 당신을 택한다 해도, 과연 그 승리는 그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당신은 지금, 누구의 침묵을 견디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