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시작된 날
"엄마, 그런 옷은 이제 좀..."
딸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수는 거울 앞에서 손에 든 블라우스를 내려놓았다. 시스루 소재가 아닌, 그냥 목선이 조금 파인 보통 블라우스였다. 그날 이후 지수는 화장도 민낵으로 바꿨다. 매주 새로운 립스틱을 사던 그녀는 화장대 서랍 깊은 곳으로 색조를 밀어넣었다.
지하 주차장, 불이 꺼지는 순간마다 차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목덜미가 낯설었다. 거기엔 여전히 살아 있는 피부가 있었는데.
감춰진 온도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욕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왜 이토록 황홀할까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건, 동시에 욕망하는 주체에서도 밀려난다는 뜻이다. 나이 든 여자는 거의 잔혹한 방식으로 관계의 양면에서 제거된다. 남편은 이제 그녀의 몸에서 ‘아내의 냄새’만 맡는다.
남자 동료들은 회식 자리에서 그녀를 ‘형님’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녀들은 알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는 새벽 3시, 문 앞에 서면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스친다. 그때만큼은 그 누구도 ‘아줌마’라 부르지 않는다. 전등 스위치도, 거울도 없는 그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다시 느낀다.
혜진의 비밀 정원
혜진, 48세, 대치동 병원의사. 남편은 대학 동기다. 결혼 24년차.
병원 4층, 폐쇄된 복도 끝 창고. 혜진은 지난 3년간 매주 수요일 점심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모르는 사람은 창고라 부르지만, 혜진은 그곳을 정원이라 부른다.
12시 30분, 의사 가운을 벗어 거치대에 걸어둔다. 그늘진 창고 안, 노랗게 변한 플라스틱 꽃들 사이로 햇살이 드문드문 들어온다. 혜진은 가방에서 꺼낸 니트 톱을 걷어 올린다. 그때마다 팔뚝이 드러난다. 그녀도 모르게 손가락이 팔뚝을 따라 훑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래서 더 뜨겁다.
“여기, 민재 씨 아니에요?”
“……네, 죄송해요. 복도 끝에서 피곤 좀 풀려다가.”
“저도요.”
혜진이 눈을 피한다.
“그래도… 좋아요. 같이 조용히 있으면.”
민재, 32세 간호사. 그는 혜진의 팔뚝을 한 번 훑는 시선을 억지로 거둔다.
“누님, 입장 바꿔도 저는 그냥… 이렇게 있고 싶네요.”
은영에게 온 첫 메시지
은영, 52세, 10년 차 인스타그램 피트니스 코치. 하루는 DM이 왔다. 20대 초반 남성 팔로워에게서. 프로필 이름은 ‘준’. 팔로워 수 3명.
언니, 혹시 PT 받을 수 있을까요?
—준
은영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새벽 2시, DM 확인에 들어가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읽고 또 읽었다.
혹시 오전 6시엔 어때요? 짐에 사람 없어서 좋아요.
—준
제가 먼저 가서 기계 닦아놓을게요.
—준
‘언니’라는 호칭, 그것은 은영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심장 깊숙이 끌어안았다.
금기의 밀착
지수는 지난주 회식 자리에서 남자 과장들이 술을 따라주며 한 대화를 들었다.
“형님, 오늘도 우리 살림 꿀팁 좀 주세요.”
“누가 형님 아냐, 지수 형님 아니라고.”
“아이고, 미안미안. 그냥 형님이 너무 멋져서.”
그들은 눈을 피하면서도 술잔을 채웠다. 지수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형님’이라는 호칭 속에 가둬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호칭은 경계를 치는 철조망과 같았다. 그녀가 한 잔 더 따라주면,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이 사람도 한때는 누군가의 욕망이었겠지’라는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수는 아침 9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20대 초반 남성 두 명이 뒤에 탔다.
“형, 요즘 누나만 좋아해 뭐?”
“미친 거 아냐.”
“아니 진짜, 동갑내기는 이제 재미없어.”
그 대화는 지수 귀에 콱 박혔다. 누나. 그것은 그녀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을 때, 지수는 문이 닫히기 전까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뒤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스쳤다.
“누나.”
지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 미묘한 속삭임만이 복도 끝에서 잔잔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