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3분, 남편의 숨소리와 계산기 소리
남편은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린 채 골아 떨어졌다. 아파트 침실은 적막했고, 유리창 너머 간판 불빛 하나가 침대 끝자락을 은은하게 비췄다. 그녀는 살짝 일어나 이불을 걷어 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허벅지를 스치자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다.
잠옷 차림으로 키친으로 걸어가며,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깨웠다.
“내일 오후 3시, 웨스틴 22층 라운지. 여권은 안 가져와도 돼.”
상사 ‘민재’가 보낸 메시지가 아직도 화면에 떠 있었다. 그녀는 화면을 꾹 눌러 삭제했다. 그러나 문장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여권은 안 가져와도 돼.
그 말 뒤에 숨겨진 뜻은 분명했다. ‘숙박권은 내가 준비했다’는 뜻. 민재는 늘 애매한 단어를 즐겼다. 직장에서는 ‘최적화’, ‘시너지’ 같은 말을, 두 사람이 눈을 맞추면 ‘필요 없어’라는 말로 대체했다.
연봉 1억, 그리고 그녀의 손끝 위로 흐른 땀방울
계약서는 키친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표지에 **‘CONFIDENTIAL’**이라는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문서를 넘기며 숫자를 확인했다.
- 연봉: 100,000,000원 (세전)
- 성과급: 최대 200%
- 복지: 해외 출장 시 전용 스위트룸 제공
- 비고: 인사팀 외 비공개
끝줄에 있는 ‘비공개’라는 단어가 그녀의 심장을 쿵쾌거리게 했다. 민재는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이직이 아니야. 너랑 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그녀는 문서 위로 손가락을 훑었다. 종이는 차가웠지만, 그녀의 손끝은 달았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단어가 코끝을 간질였다. 5년 전, 남편에게 청혼받을 때도 이런 전율은 없었다. 남편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내밀며 “평생 함께하자”라고 했지만, 그때 그녀는 회사 일 때문에 지각할까 봐 초조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새벽 2시 13분에도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에 소름이 돋으며 심장이 요동쳤다.
호텔 라운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펜
다음날 오후 3시. 웨스틴 22층 라운지.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왔다. 목선이 깊게 파여 있어 브래지어를 착용할 수 없었다. 민재는 벌써 와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두 잔의 샴페인과 검정 만년필만.
“서류는 이미 검토했지?” 민재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자 목뒤로 알코올이 타고 내려갔다. 민재는 서류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미소 지었다.
“사인은… 방에서 하자.”
32층 스위트룸, 그리고 손에 쥐어진 카드키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민재는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는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얹었다. 문이 열리자, 스위트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민재는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귓불을 살살 간질였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기서… 사인?” 그녀가 물었다.
민재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몸에 사인해 줄게.”
카드키를 손에 쥔 그녀의 심장은 거의 터질 듯 뛰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계약서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펜을 들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그녀는 남편의 체온 대신 민재의 숨결이 닿는 것을 느꼈다.
이혼 서류 vs 계약서, 그리고 침대 시트 위에 놓인 펜
오후 6시. 그녀는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남편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남편이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오늘 늦었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민재가 남긴 향기 가득한 터치를 목 뒤로 숨겼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민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부터 출근. 그리고... 이혼 서류도 준비해 줄래?”
에필로그: 차가운 계산, 그리고 뜨거운 혀
한 달 후. 그녀는 민재와 함께 뉴욕 출장 중이었다. 호텔 침대 위에서, 그녀는 민재의 숨결이 귓가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민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게 사랑일까, 계산일까?”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 사이로 간질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알았다. 이건 사랑도, 계산도 아니었다. 그저 탈출이었다. 남편의 체온 대신, 상사의 뜨거운 숨결을 선택한 순간, 그녀는 이미 새로운 계약에 사인한 것이다.
“연봉 1억이 남편보다 달콤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는 이제, 민재의 계약서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