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무 커서, 내가 작아 보여"
한강 뷔페 레스토랑.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불빛이 잔물결처럜 흔들린다. 나는 손에 든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상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나도 몰래 뒷걸음질 칠 것 같아. 네가 너무... 너무 잘나 보여서.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나는 웃었다. 그가 말한 ‘잘난’ 건, 내가 대기업 전략기획팀 팀장이라는 사실 한 조각도 아니었다.
그건 나의 눈빛이었다. 말이 없을 때조차도, 상대의 속마음을 끄집어내려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빛. 연애 초반이니까 애써 다정하게 웃어줬지만, 남자들은 결국 그 눈빛 뒤에 무언가 두려운 것을 발견한다.
근육질 욕망 뒤에 숨은 얼음장
사회는 ‘강한 여자’를 응원한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오늘도 여전히 거짓. 실제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함’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공포를 키운다.
나는 힘을 원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 힘이 실제로 내 앞에 서면, 나는 얼음처럜 얼어버려.
그 이유인즉슨, 힘은 곧 ‘통제 불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경하는 건 스크린 너머의 영화 속 여전사. 그녀는 알록달록 CG와 함께 안전하게 소비된다. 하지만 술 한 잔에 나지막이 자신의 주도권을 선언하는 실제 여자는, 남자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확 빼앗는다는 불안감을 선사한다.
욕망과 두려움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한 여자는 상처받지 않을 것처럜 보이지만, 정작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 준호의 도피
준호, 32세, 스타트업 대표. 독일 유학파에 190cm, 근육질이라 얼굴 붉히는 여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연애 앱에서 매치됐고, 첫 만남은 이태원 와인바에서.
너는 뭔가... 남자랑 똑같은 눈빛이야. 준호가 말했다.
어떤 눈빛?
먼저 누군가를 평가하는 눈빛.
나는 피식 웃었다. 그날 이후로는 계속 내가 날짜를 정하고, 술을 시키고,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그는 떨렸다. 처음엔 흥분된 떨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두 번째 만남, 나는 그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 나는 하고 싶으면 하는 스타일이야.
그게... 좀 무서워. 준호가 속삭였다.
그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나중에 공동 친구를 통해 들었다. 준호의 말이라. "그 여자는 나를 먹고 뱉을 것처럜 봤어. 나는 사냥감이 된 느낌이었어."
나는 웃었다. 준호는 사실 여자 몸에 굶주렸던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굶주렸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서연이의 거울
서연, 29세, 약사. 남들 눈엔 유리처럜 보이지만 속은 용암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남자는 시인이라고 했. 시집도 냈고, 눈빛도 연필처럜 부드러웠다.
서연은 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연애할 때 주도권을 좋아해.
주도권이 뭔지 보여줘. 시인이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로 서연은 그를 자기 아파트로 데려왔다. 촛불 켜고, 와인 따르고, 그의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시인은 웃었다. 처음엔 장난처럜. 하지만 서연이 그의 손목에 실크 스카프를 두르자, 시인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찾아왔다. 그 흔들림은 커졌다. 서연이 물었다.
왜 떨려?
네가... 예상 밖이야.
결국 시인은 연락을 끊었다. 마지막 문자. "나는 사랑이 느슨한 줄 알았어. 그런데 너는 너무 조여서 숨이 막혀."
서연은 혼자 남아, 자기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원한 건 단지 솔직한 욕망이었는데, 왜 그들은 도망가지?
얼음장 위의 사냥꾼, 그리고 배신당한 신화
우리는 ‘강한 여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키웠다. 영화 속, 드라마 속, 책 속. 그녀는 남자를 지휘하고, 범죄자를 때려 눕히며, 결코 눈물짓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그녀가 등장하면, 우리는 얼음장 위에 서 있는 사냥꾼을 마주한다. 그녀는 규칙을 깨뜨리고, 게임판을 흔들고, 네가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허구적 사명감을 조롱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신화 배신’이라 부른다. 우리가 동경하는 신화는, 결코 현실에 발붙이지 않는다. 현실에 떨어진 순간, 신화는 더러워지고, 금기와 두려움으로 변한다.
당신이 원한 건 ‘강한 여자’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강한 여자’였다는 걸, 지금 깨달았니?
물음표 하나, 남겨둔다
그렇다면 너는 어디에 서 있니. 여전히 ‘강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댓글에 적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네 위에 올라탈 때마다 뒷걸음질 치고 있지는 않니.
그녀도 알고 있다. 네가 원하는 건 힘든 게 아니라, 순종이라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가장 깊은 외로움을 맛본다.
이제 묻자. 너는 그녀를 두려워하는 게 맞니, 아니면 네가 가진 힘을 그녀에게서 발견해서 두려워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