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숨결과 식은 피
"넌 절때 하지마."
유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왼쪽 눈꺼풀에 새까만 점 하나가 떨리는 것 같았다. 연기 너머로 나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짧게 웃었다.
"지훈은 니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썩었어. 그래도 난 그게 좋아."
그날 이후로, 나는 지훈이 아닌 ‘지훈의 손톱 아래 검은 때’에 시선이 갔다. 그가 유미의 허리를 붙잡을 때마다, 나는 그 가죽 재킷에 배어 있을 법한 피 냄새를 떠올렸다. 왜 하필 그를 선택했을까. 내가 빗질해준 머릿결, 밤새 읽어준 책, 다 때려 부수고 온 그에게 왜 몸을 맡기는 걸까.
혀끝에 남은 태연한 맛
불량배는 단순한 ‘나쁜 남자’가 아니다. 그는 룰을 부숴야만 존재감을 느낀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고양이 목을 비틀어 죽이는 것도, 동아리 후배의 얼굴을 찌그러뜨리는 것도—모두가 ‘나는 통제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여자가 그를 바라볼 때 지느러미처럼 올라타는 전율은 두 가지다.
- 안전불감증이란 이름의 환각: 그가 미치광이라면, 나는 그 화살이 안 미치는 유일한 특별 존재일지도.
- 청결의 역설: 절대 정화될 수 없는 오염—그래서 끝까지 탐닉할 수 있는 오염.
시은이 사라진 4월 17일
시은(27)은 인턴 끝나고 대학원 행정실에서 근무한다. 키 163cm, 브라운 머리를 매일 한쪽으로 넘긴다. 4월 17일 밤, 그녀는 ‘도현’이란 남자와 처음 잤다. 도현은 31세, 전과 세 번, 팔뚝에 ‘No Future’ 문신.
치킨집 뒷골목에서 그가 불을 붙인 라이터를 시은의 머리카락 끝에 갖다 댔다. 속눈썹 한 올이 살짝 말라 비틀거렸다.
이 사람은 진짜로 나를 태워 죽일 수도 있겠다.
그럼 내가 끝까지 살아남으면, 그 누구보다 특별하겠지.
다음 날 시은은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제 너무 무서웠어. 근데… 또 만나기로 했어.” 그 뒤로 시은은 휴가를 썼다. 사내 누구도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혜진이 남긴 마지막 메모
혜진(33)은 루이비통 매장 매니저다. 코끝에 점 하나, 결혼 5년 차. 남편 ‘재혁’은 투자 자문사 부장이다. 매일 자정 전에 잠든다. 3월 3일, 혜진은 재혁이 잠든 뒤 현관문을 살금살금 열었다.
동네 카페 뒤편, ‘재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석은 혜진 고등학교 동창, 요즘은 유흥업소 호스트. 이마에 흉터 하나.
차 안에서 재석은 혜진의 가슴 위에 서 있던 목걸이를 잡아 끊었다.
니 남편이 줄 거라며?
그래.
버려. 나는 네가 아무것도 없을 때 더 끌려.
혜진은 재혁 몰래 재석에게 500만 원을 송금했다. 다음 날 오후, 혜진은 재혁의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실종 신고서를 발견했다. 재혁이 먼저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결국 혜진은 재석에게로 영영 가버렸다. 그녀의 휴대폰에는 “난 이제 네가 지켜줘야 하는 몫”이라는 마지막 메모만 남았다.
왜 우리는 늑대에게 다가가는가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여성은 선사 시대부터 ‘외부자’를 선택했다고. 낯선 유전자가 씨앗에 불을 붙인다. 하지만 요즘엔 유전자보다 직접적 자극이 문제다.
- 도파민의 폭탄: 위험→도망→간신히 살아남음→도파민 폭발. 반복 가능한 최고의 마약.
- 언어의 실종: 지훈, 재석, 도현은 모두 ‘말로 풀지 않는다’. 소리, 손끝, 눈빛만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침묵은 상상을 부른다.
- 원죄의 교환: 그가 전과자라면, 나도 뭔가 지워야 할 과거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더러움을 맞바꾸는 의식.
당신의 연인은 오늘 밤 무엇을 상상할까
지금 이 순간, 지하철에 앉아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디를 향해 있을까? 당신이 보낸 ‘사랑해’ 문자는 읽혔지만, 아마도 스크린 너머로 봤을 다른 누군가의 피 묻은 손가락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조용히 웃는 이유, 아무 일 없다고 말하는 이유—그건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는 안 될 방을 지키는 일종의 배려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가. 혹시 당신 역시, 그녀가 착한 척하는 순간마다 ‘진짜 날 알면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있지 않은가? 그 공포 속에서, 어쩌면 당신도 누군가의 불량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