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루이스 치과, 내가 예약해뒀어."
그녀는 수요일 아침, 사내 복도 끝에서 흰 치약과 같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말했다고 기억하고 싶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내 귀를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진 예약 카드는 뜨거웠다. "이 카드, 잃어버리면 안 돼"라며 내 손바닥에 살짝 내려놓았을 때, 그녀의 손끝이 0.7초 정도 더 머물렀다. 그 짧은 접촉이 내 하루 전부를 뒤엎었다.
나는 그날 밤 잠을 못 잤다. 아랫니가 살살 아팠지만, 진짜 아픈 건 다른 곳이었다.
굳은살처럼 박힌 예약 시간
9시 47분.
루이스 치과 로비. 하얀 간판 위 간호사의 시선이 차갑다. 나 혼자 앉아 있다. 그녀가 올까, 안 올까.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카운터에 가서 물었다. "박지혜 씨 예약이요?" "네, 오후 2시로 변경됐습니다."
2시. 나는 10시에 왔다. 그녀는 내가 오지 못하도록 시간을 바꿨다. 아니, 나를 두고 갔다.
충치보다 깊은 구멍
치과 의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의사는 내 윗니에 구멍이 있다고 했다. 원래 거기 있던 충치가 아니었다. 어젯밤 손톱으로 긁어댄 자리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버렸다는 걸.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헤매이며, 내 일정표를 접어버리고, 출근길에 치과 앞을 서성였다. 그건 단순한 호감이 아니었다. 집착이었다.
같은 덫에 걸린 남자들
"나도 그랬어.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더라고."
성민, 31세. 그는 한 달 전, 같은 치과에서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 여자는 나한테 '꼭 데려다줘야겠다'고 했어. 근데 그날 아침에 문자가 왔지. '아파서 못 간대'. 난 그냥 병원에 가서 2시간을 기다렸어. 왜? 그녀가 혹시나 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성민은 병원 벽에 그녀의 이름을 17번 적었다고 했다. 볼펜으로, 조그만 글씨로.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마지막 진료
다음 주, 나는 다시 그 치과에 갔다. 혼자.
의사가 말했다. "이번엔 마취 안 하고 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게 필요했다. 아픈 것만이 이 혼란을 정리해줄 것 같았다. 드릴 소리와 함께, 턱이 울렸다. 그 고통 속에서 비로소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왜 이런 덫에 빠지는가
그녀는 나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내가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사람은 버림받을 때, 버림받은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게 있다. 내가 이만큼 초라할 수 있다는 걸 마주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그 버림 앞에서 더 부당하고 구차해지지. "왜 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하면서.
치통은 약 먹으면 가셨다. 하지만 이 상처는?
지금 이 순간, 너는 어떤 치과 약속 앞에 서 있니? 그리고 그녀는 올까?
아니,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거다.
네가 기다리는 게 그녀 말고 다른 누군가는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