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47초
화면 꺼짐 방지가 풀리기 일보 직전, 재현의 엄지는 여전히 카톡 입력창 위를 맴돌았다. 21:43. 민서의 프로필 사진 옆에 초록 체크 두 개가 선명했다. 읽음. 그 뒤로는 침묵만 3분 47초째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매일 밤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눈을 뜨고 있어"
한 줄, 열아홉 글자. 보내기만 하면 끝. 그러나 손가락은 마치 얼음장 위에 올려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재현은 이미 삭제했다 다시 썼다를 열두 번 반복했고, 눈꺼풀만 깜빡일 뿐이었다.
홍대 뒷골목, 블랙핑크
간판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재현과 지수. 맥주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재현이 중얼거렸다.
"야, 혹시 나 진지하게 말하면 다 도망가?"
지수는 캔 뚜껑을 따며 피식 웃었다.
"그럼 반만 해, 그것도 모자라면 반의 반만. 걍 톤 맞추면서 살자"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이미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잠금 해제, 카톡, 민서 채팅방. 47개의 말풔선이 굴착지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준호의 계산서
강남역 CGV 매표소. 영화 끝나자마자 혜진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티켓 두 장, 팝콘 L, 콜라 두 잔. 총 38,500원. 준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내가 할게"
"됐어, 다음에 사줘."
혜진은 여유롭게 티켓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준호의 머릿속은 빨간색으로 가득 찼다. 저녁은 분위기 좋은 곳, 맥주 한 잔? 수십만 원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밤 11시, 혼술집. 준호는 소주 네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돈 없으면 연애는 꿈도 꾸지 마라.
누가 올린 댓글인지 모르지만, 그 문장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준호는 혜진에게 쓰다 만 카톡을 꺼냈다.
"돈 많지 않아도 널 지켜줄 마음은 백억짜리야"
커서가 문장 끝에서 깜빡였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성민의 3단 콤보
강남역 2번 출구. 나영이 핸드폰을 꺼내 든 순간 성민의 두 눈이 초점을 잃었다.
첫 메시지: "오늘 우연히 닮은꼴 연예인 찾았어 ㅋㅋㅋ 너 닮은 거 같은데?"
하트 이모티콘 두 개.
두 번째: "혹시 고양이 키워? 내일 유기묘 봉사활동 가는데 같이 갈래?"
웃는 얼굴 한 개.
세 번째: "내 mbti가 INFJ래 ㅋㅋ 너도 궁금하다"
읽씹 6분째. 성민은 시계 초침만 바라봤다. 7분, 8분. 한 번 더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점점 손에 든 폰이 무거워졌다.
조용한 폭력
사람들은 젊은 남자들의 연애 고통을 ‘부족함’이라는 단어로 날인한다. 키, 연봉, 집안, 말투까지.
그러나 그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부족함’이 아니라 ‘완전한 마음’이다. 깊이 좋아한다는 걸 들키면 상대가 놀라 떠날 거라는 불안. 그 불안은 그들의 목소리를 작게 만들고, 결국 말을 아끼게 만든다.
잠긴 문장들
다음 날 새벽 2시 17분, 재현은 다시 카톡을 켰다. 입력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사실 나는 매일 밤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눈을 뜨고 있어
그 문장은 그대로 두고, 재현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은 이제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에게 아직 보내지 못한 문장이 있지 않은가. 그 문장은 지금도 입력창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내기 버튼 위에 떨던 손가락, 3분 47초. 그 순간은 영원히 지나가지 않은 듯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