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너는 여기까지야. 절대 넘지 마."
밤 11시 48분, 서울 강남의 한 34층 고층 아파트. 거실 조명은 꺼지고, 침실엔 동그랗게 흐릿한 벽등 하나만 남았다. 준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이불 끝을 살짝 걷어 올린다. 그 사이로 지은이 누워 있다. 눈은 감긴 척하지만 숨소리가 일정하지 않다. 준혁은 속삭인다.
너도 알고 있지? 오늘은 우리가 정한 D-데이야.
삼일 전 문자로 확정된 규칙 7, 지금부터 유효해.
넘으면 끝장이야. 둘 다.
지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준혁은 그 반응을 보고 살짝 미소 짓는다. 그리고 양손을 가슴 위에 포개며,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1, 2, 3... 다섯까지 세면 행동이 시작된다. 하지만 여섯을 넘기지 않는 것이 규칙 3. 그 이상은 금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은 모두 절대,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다.
끈적한 숨결이 흐르는 이유
결혼 5년차. 세상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착한 부부’의 외피를 벗어 던질 때마다, 그들은 새카맣게 응축된 욕망을 주머니 속에 숨겼다. 그 주머니는 형광펜으로 ‘SECRET’이라 적힌 메모지 위에, 작고 초라한 글씨로 새겨진 계약서다. 배우자에게 말하면 즉시 파혼. 변호사 비용은 배상. 아이들은 전부 태어나지 못한 채 지워지는 꿈. 그 두려움을 담보로, 규칙은 더 단단해진다.
왜 굳이 규칙이 필요할까? 우리는 서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 해치지 않으려는 불안이 더 크니까.
거대한 사랑의 이름 아래, ‘절대’라는 단어는 갇힌 짐승처럼 으르렁댄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얼음장 같은 규칙으로 서로를 묶고, 그 사이로 뜨거운 숨을 뿜는다. 금기의 온도는 얼음보다 뜨겁고, 사랑보다 끈적하다.
첫 번째 이야기: 지하 주차장 2열 3번
2022년 11월, 부산 수영구. 민서는 회사 퇴근길에 카톡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 남편 재훈. 내용은 단 한 줄.
오늘 밤, 지하 주차장 2열 3번 칸. 검은 봉투 안에 든 건 네가 입고 싶은 거야.
민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봉투 안에는 지난번 쇼핑몰에서 훔쳐 본 레이스 가터벨트 세트가 들어 있을 거다. 그녀가 결혼 전에 입었다가, 신혼여행에서 재훈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그것. 하지만 결혼 후론 ‘하나도 안 어울려’라는 말에 옷장 구석에 처박혔던. 그게 다시 등장한다.
지하 주차장은 어둡고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민서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고, 안에는 검은 가죽 미니스커트와 가터벨트, 그리고 작은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입고 5층 계단실로 와. 15분 내 도착 못 하면 오늘은 끝’.
그날 이후, 매주 수요일 9시 30분이 되면 민서는 회사 뒷문으로 새치기처럼 나온 뒤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있는 봉투 안에는 매번 다른 아이템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입고 계단실로 가면 재훈이 등 뒤에서 끌어안는다. 끝내 섹스는 없었다. 단지 20분간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고, 서로의 규칙에 따라 ‘끝내지 않는다’는 게임을 했다.
민서는 한 번도 재훈에게 묻지 않았다. ‘왜 이걸 사줬어?’ 혹은 ‘왜 우리 집 침대에선 절대 안 해?’ 그 물음이 규칙 번호 1을 깨뜨릴 테니까. 질문이 금지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봉투를 들고, 5층 계단실 문 앞에서 숨을 죽인다.
두 번째 이야기: 녹음기 속의 너와 나
2023년 7월, 대구 수성구. 40대 중반의 정우는 아내 선영 몰래 서재 서랍 깊숙이 ‘그것’을 숨겼다. USB 하나. 8GB 용량. 안에는 선영이 5년 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눴던 그날 밤, 녹음된 47분 13초의 파일이 들어 있다.
정우는 밤마다 이어폰을 꽂고 3분씩만 재생한다. 선영의 첫 신음소리, 떨리는 말투, 그리고 자신이 속삭였던 말들. 그날 이후, 그들은 결혼했고, 아이 둘을 낳았다. 하지만 정우는 그 파일을 아내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 선영은 결혼생활 내내 ‘조용히’만을 고집했고, 그날의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유령이 됐기 때문이다.
그 USB를 듣다 보면 정우는 현재의 아내를 두고 옛날 아내를 그린다. “그때의 너는…” 하고 말문을 열다 말고, 다시 이어폰을 꽂는다. 규칙은 단순하다. — ‘선영은 모른다’는 가정 위에 모든 욕망을 쌓는다. 그래서 정우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그날의 잔향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의 미로에 숨은 그림자
심리학자 에스테르 페렐은 말했다. “모든 애정은 금기를 동반한다.” 우리는 상대를 절대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반복하면서도, 동시에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충동을 품는다. 그 충동은 두려움과 사랑이 뒤섞인 공포의 결정체다.
연구에 따르면, 결혼 10년차 부부의 72%는 ‘배우자에게는 말하지 못할 은밀한 욕망’이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중 58%는 “그걸 말하면 관계가 깨질까 봐” 숨긴다. 숨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를 사랑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해서.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은 ‘숨기는 것’을 통해 더 커진다. 금기는 사랑을 가열하는 난로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알고 나면 두려워지는 걸 알기에 멈춘다. 그 미지의 영역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당신도, 룰북을 숨기고 있나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침대 밑 서랍이나 옷장 속 상자, 혹은 휴대폰 메모장 어딘가에도 ‘절대’라는 단어가 새겨진 룰북이 있지 않은가. 그건 아마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은 아내가 잠든 뒤에만 나 혼자 30분 동안 그 영화를 본다.” 혹은 “남편이 없을 때만, 그 향수를 뿌린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아직도 꺼내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룰북 한 장을 들이밀면 지금의 ‘우리’가 산산이 부서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대 밑에 숨겨둔다. 사랑이 자랄수록 함께 커가는, 검고 끈적한 비밀을.
그렇다면, 만약 당신의 배우자가 지금 당신의 룰북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걸 부인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부인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