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릴 때
밤 열두 시, 현관문이 삐걱이 열렸다. 지수는 구두 한 짝을 들고 맨발로 들어왔다. 검은 드레스에 배어 있는 남자 향기가, 민재가 평생 입던 니트에서 풍기던 라벤더 세탁세제 냄새를 단숨에 짓눌렀다.
민재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지수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신발장을 열어 구두를 쏙 넣고,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말하기 싫어, 오늘은."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민재는 그날 이후 지수가 사과할 거라는 기대를 접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발밑에 남아 있는 타인의 체취가 이미 충분한 답을 주고 있었으니까.
뜨거운 숨소리 사이
민재는 침대 옆에서 지수의 숨소리를 캐물었다. 등을 돌린 채로, 그녀는 여느 때처럼 고른 숨을 쉬었지만 몸은 데워져 있었다. 처음엔 차가웠다가, 이내 익숙한 열기로 돌아오는 체온. 그것이 남의 손끝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꺼풀 뒤에서 지수의 고개가 반쯤 뒤로 젖혀지는 장면이 아른거렸다.
‘아, 아니… 이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가 다물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숨. 민재는 알았다. 그것은 떨림이 아니라 채움의 여운이라는 걸.
47일의 기록
처음엔 회식이었다. 지수는 술잔을 돌리다 태현과 마주쳤다. 그는 웃으며 손등을 스쳤다. 그때였다. 지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낯선 사람의 입에서 듣는 기분에 놀랐다.
"지수 씨는… 뭔가 항상 굶주려 있어 보여요."
"뭘요."
"알고 싶은 것, 혹은 깨닫고 싶은 게요."
그날 이후 수요일은 지수에게 민재와의 결혼기념일보다 중요해졌다. 태현의 집 현관문을 밀어 열면, 그 집 안은 민재가 평생 들인 적 없는 향이 가득했다.
지수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태현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살며시 감쌌다. 슬슬 위로 올라오는 손길. 지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은 눈 속에서도, 그녀는 분명 자기 자신의輪郭을 그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지수는 처음으로 울었다. 태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자리는 이미 다른 감정이 차지하고 있었다.
민재가 본 하나의 흔적
민재는 지수가 샤워하는 사이 휴대폰을 열었다. 잠금 화면을 넘기자, 사진 한 장이 떴다. 지수의 손목. 약간 흐릿한 초점, 하지만 선명한 글씨. 그것은 민재 이름의 첫 글자가 아니었다.
‘T’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세면대 위에 머리를 숙이고, 눈물이 나올 기미조차 없었다. 다만, 속이 울렁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잤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눈빛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돌아온 그녀, 변한 그녀
지수는 결국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민재가 지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지수는 받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 편에 있길 원하는 거잖아."
민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물었다.
"행복해, 지금?"
"모르겠어."
"알 수 있을까?"
"당신이 떠나지 않을 때."
아직 끝나지 않은 향기
현관문 옆 신발장에는 지수의 구두가 다시 꽂혀 있다. 하지만 민재는 알고 있다. 그녀의 발끝에 아직 남아 있는 낯선 체취가, 이 집 안의 모든 것을 서서히 바꿔놓고 있다는 걸.
지수는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 민재는 여전히 사과를 원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안다. 그 사과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왜냐하면 그 말이 나온 순간, 이 모든 게 끝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