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니면 안 돼"
엘리베이터 안, 늦은 저녁 9시 47분. 네 차례를 기다리다가 우리 사이 두 번째 눈 맞음. 그가 손가락에 낀 반지가 불빛에 번쩍였다. 모르는 척, 나를 보지 않는 척하다가 갑자기 시선을 꽂았다.
— 왜 그래.
— 뭐?
— 나만 바라보네.
숨이 멎었다. 반지는 분명했는데 눈빛은 너를 원한다고 말했다. 열이 올랐다. 나는 알았다. 이건 시작도 끝도 없는 거짓이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그를 향했다.
반짝이는 함정
남의 반지가 반짝일 때, 우리는 뭘 보나. 사랑? 책임? 아니, 가능성의 틈이다.
그가 지금 이 순간만 나를 원한다면?
반지는 경계다. 그러나 반지는 동시에 도전이다. 이 사람을 뺏을 수 있을까 하는 오래된 욕망. 결혼은 끝난 게 아니라 시작할 단계라는 착각.
그는 전략적이다. 반지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짓는다. 이건 나만을 위한 연기다. 다른 여자들은 모르는, 나에게만 건네는 비밀 눈빛.
그런데 그 눈빛은 사실 누구에게나 건넨다. 나는 단지 먼저 받아들인 것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은, 31세 UX디자이너. 회사 동아리 MT에서 만난 형준과 눈이 맞았다. 형준은 장난기 많은 35세 마케팅팀장. 손에 반지는 있었지만 지은은 몰랐다.
— 반지, 뭐야?
— 그냥 장식이야.
— 장식이...
첫 키스는 술집 뒷골목. 지은은 그날 밤 잠을 못 잤다. 형준은 새벽 3시 문자를 보냈다.
아직도 네 눈빛이 떠올라.
그 후로 매주 목요일마다 호텔방. 지은은 물었다.
— 네가 왜 나랑...
— 너는 특별해.
특별함은 거짓이었다. 지은이 회사 그룹채팅에 '형준 아내'를 찾아보니 프로필 사진이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만 특별하다고 했는데, 사진 속 그녀도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한 이유
우리는 끌린다. 금기는 결국 가능성을 확대한다. 반지는 절대 안 돼를 *그래도 되나?*로 뒤바꾼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위험한 자기 증명'이다. 나는 특별하다는 증거를 원한다. 그가 반지를 낀 손으로 나를 만지면, 나는 그의 선택을 받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는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를 피웠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멈칫한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반지를 벗을까? 라는 무모한 기대. 반지를 벗는 순간 마법이 깨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지를 낀 채로 끌려간다.
네가 사라진 밤
며칠 전, 나는 그를 다시 봤다. 같은 엘리베이터, 같은 밤. 이번에는 그의 옆에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 오늘은 일찍 끝났네.
— 응, 네가 좋아하는 영화나 보자.
그가 나를 봤다. 눈빛이 변했다. 약간의 당황, 그리고 끝내는 무표정. 나는 그 눈빛이 기억했던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를 원한 적이 없었다. 단지 나를 이용했을 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그를 원했던 건 아닐까.
문이 닫히는 순간
손에 반지 낀 그의 눈빛이 왜 나만을 원하는 척했을까.
대답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눈빛을 받아들인 순간 나 역시 이미 반지를 차고 있었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