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녀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내던지고 사라졌다

칫솔 하나만 남긴 채 사라진 그녀. 데이트앱에서 만난 단 하루, ‘존중’이라는 단어가 권력의 가면이 되는 순간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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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내던지고 사라졌다

오늘 아침, 나는 화장실 조명 아래서 그녀가 남긴 칫솔을 들었다. 어젯밤까지 함께 쓰던, 투명한 손잡이에 ‘SOFT’라 새겨진 초록색 칫솔. 그녀는 이 칫솔을 보며 웃었다. "딱 너 같아"라고 했지. 그리고 얼굴 한 번 안 보고, 존중이라는 단어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욕망의 냄새

존중. 무게감 있는 글자였다. 처음엔 감동했었다. 그녀는 내가 반려견 사진을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도 동물을 좋아해. 서로를 존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말할 때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건, 사실 그만큼 낮춰야 한다는 뜻 아니겠어.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존중은 권력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자발적으로 무릎 꿇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키스할 때 너무 급했던가. 아니면 아침에 눈 맞추기를 거부한 게 문제였나.


실제 같은 두 개의 하루

1. 지아의 하루, 31세, 광고회사 AE

지아는 앱에서 ‘토요일 오후 3시, 영화 한 편만 보고 헤어질까요?’라고 제안했다. 상대는 대기업 마케터였다. 영화관 앞에서 그는 이른바 ‘올바른’ 옷차림을 했고, 팝콘 하나도 계산해서 샀다. 관람 내내 그의 손이 무릎 위로 살금살금 내려왔을 때, 지아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좀 천천히 가요. 서로 존중하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끝나자마자 그녀는 화장실에 가더니, 앱에서 차단했다. 푸른 화면 위로 ‘차단됨’이라는 문구가 떴을 때, 지아는 손에 든 메이크업 파우더를 거울에 내려찍었다.

왜 존중을 요구했을까. 내가 진짜 원한 건, 그가 더 욕망하도록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거였는데.

2. 민재의 하루, 28세, 스타트업 개발자

민재는 혜원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요’라는 답장에 환호했다. 강남역 2번 출구. 그녀는 카키색 재킷을 입고 왔다. 첫인상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술집에서 세 번째 잔을 기울이며 민재는 말했다.

나 진짜 솔직한 사람 좋아해. 그냥 있는 그대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혜원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민재씨는 지금 나를 얼마나 존중하나요?

질문의 날카로움에 민재는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계산서를 먼저 내밀며 일어났다. 다음 날, 카카오톡 채팅방은 사라졌다.

존중은 계산서 같았다. 누군가가 먼저 내밀면, 끝이었다.


존중이라는 이름의 투명한 칼

우리는 왜 존중이라는 단어에 이끌릴까. 정답은 단순하다. 존중은 양면의 칼이기 때문이다. 한쪽 날은 ‘나를 배려하라’는 명령이고, 다른 한쪽은 ‘내가 너를 배려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다.

데이트앱에서 만난 누군가가 ‘존중’을 입에 올릴 때, 우리는 시선을 먼저 떨어뜨린다. 과연 내가 얼마나 만족할 만큼 존중하고 있을까. 그 질문은 곧 ‘나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로 변주된다.

그래서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조명 아래서 칫솔을 볼 것이다. 그녀의 입맞춤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연한 자국.


마지막 질문

당신은 지금도 존중을 외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 단어를 품고서 누군가를 떠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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