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신고 50번 만에 나도 범인이 되었다

밤마다 온몸을 비비는 그의 시선이 닿는 것처럼, 민원실 조명도 서서히 나를 더렵혔다. 50번째 고소장을 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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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 50번 만에 나도 범인이 되었다

“그 여자는 또 왔네”

경찰서 민원실 새벽 3시. 형광등 불빛이 내 얼굴을 창살처럼 가른다. 49번째 접수증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담당 형사는 시계를 보며 속삭였다.

“밤마다 나오면… 네가 더 수상해 보여.”

그 말은 입 안에 숨겨놓은 손가락처럼 간질거렸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벌어진 쇼트컷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가 촛점을 잃었다가 다시 번쩍였다. 잘못 봤나. 아니, 확실히 훑었다. 목뒤에서 엉덩이까지 한 번에.


밤마다 서는 복도

처음엔 문자였다.

“너 뒤태가 좋아서 밤마다 서 있어. 조용히 해.”

그날 이후 엘리베이터 안은 음습한 수족관이 되었다. 아래층 남자가 타면 향수 냄새가 올라왔다. ‘레드 루즈’, 봉지 끈에 묻은 향. 문이 닫히면 내 영문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반사되어 그의 눈과 마주쳤다. Eunchae. 입술을 꼭 다물면서도 그가 발음하는 것처럼 보였다. Eun…chae. 한 음절 끊어 읊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쓰레기 봉투가 문 앞에 놓인 건 일주일 후였다. 생선 비린내가 스며든 안쪽에, 찢겨진 스타킹 조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검은색, 내가 며칠 전 버린 그것. 누군가 주워 와서 다시 선물하는 기분이었다. 손끝에 닿는 비닐의 차가움이 가슴속에서 열로 바뀌었다.


21층 CCTV와 떨리는 손

새벽 2시 47분. 21층 복도 카메라는 적외선으로 내 몸을 녹여낸다. 녹화 화면 속 나는, 벽에 귀를 붙이고 있는 여자로 기록된다. 떨리는 손목이 화면 밖으로 삐져나와도 못 본 척한다. 아래층 남자는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춘다. 초침 소리처럼. 두 발이 번갈아 떨어지는 순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그래도 그는 걸었다. 문 앞까지 와서 멈췄다. 문 손잡이를 잡는 소리. 딸깍. 끝내 열지는 않았지만, 손잡이를 흔드는 강도가 갈수록 커졌다.

CCTV 영상을 확보하려고 경찰서를 찾았다. 담당자는 USB를 꽂으며 혀를 찼다.

“여기서 왜 이런 옷을… 뒤태가 흔들리잖아.”

화면 정지. 내가 잠옷 차림으로 문 앞에 선 장면. 허리가 구부정해져 엉덩이가 도드라진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정지. 되감기. 느린 재생. 다시 한 번 흔들린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혈관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단톡방과 블라인드

동네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 벌거벗은 등. 흰 셔츠가 반쯤 들어 올려져 속살이 드러났다. 내가 아닌가 싶었다. 같은 동네, 같은 층. 누군가 복도 CCTV를 가로채 올린 것이다. 댓글은 빠르게 증식했다.

‘여자가 밤마다 나서서…’ ‘남자 입장에선 오해할 수도’ ‘우리 집값 떨어지면 누가 책임져’

숫자가 올라갈수록 내 얼굴은 사라졌다. 누드처럼 벗겨진 등만 남았다. 가슴이 아닌 등이라는 이유로, 더 오래 버티었다. 그래도 나는 피해자라고. 그 말은 톡방에선 아무도 듣지 못했다. 대신 ‘매물 급매’라는 공인중개사 문자가 왔다. “급하게 떠나셔야 할 것 같아요.”


50번째 접수증

50번째 민원 창구. 접수증을 건네받는 순간, 직원은 나를 별명으로 불렀다.

“오, 50번 아가씨.”

종이가 두꺼워질수록 나는 작아졌다. 한 장이 1년처럼 느껴졌다. 뒤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중얼거렸다.

“또 그 여잔가” “저렇게 예쁜데 왜…”

예쁘다는 말은 성범죄자들이 숨겨놓은 동전이었다. 뒤집으면 상처가 드러났다. 나는 접수증을 움켜쥐고 나섰다. 복도 벽에 붙은 안내문이 새로 바뀌었다. ‘허위 신고 시 처벌’이라는 문구 아래, 작은 CCTV 아이콘이 찍혀 있었다. 마치 내 엉덩이를 찍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CCTV가 찍은 나의 떨리는 손

50번째 고소장을 쓰던 날 밤. CCTV는 한 걸음 더 다가와 나를 찍었다. 떨리는 손목이 사각거리는 서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록번호 50-014. 접수인 필체가 흔들려 ‘피해자’라는 글자가 ‘범인’처럼 보인다. 나는 펜을 놓고 눈을 감았다. 이젠 내가 문제인가. 그 질문은 침묵 속에서 부풀었다. 밤마다 내 문 앞에 선 그 남자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 이웃도, 그리고 나도. 모두가 같은 사각형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당신도 그녀의 엉덩이를 훑으며, 범인이라 낙인 찍었나.

CCTV 속 떨리는 손 뒤로, 당신의 얼굴이 비친다. 창살 없는 감옥. 서로를 향해 침을 뱉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날 밤 복도에 선 가해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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