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이라면, 붉은 얼룩이 하나쯤 있어야지.”
지훈이 그 말을 흘리자, 수진은 조용히 침대 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차갑게 굳은 토마토젤리였다. 그녀는 그걸 꾹 눌러 터뜨렸다. 붉은 액체가 뱀처럼 흘러내려 하얀 시트를 범했다.
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그 빛에 담긴 건 감동이었고, 승리였으며, 안도였다. 수진은 속으로 웃었다. 저 눈빛이 내가 원했던 전부였어.
처음이 아닌 첫날밤
수진은 19살, 솔직히 말해 이미 연애는 다섯 번, 그 너머의 밤도 여럿 지났다. 그러나 지훈에게는 “운동으로 터졌다”고 말했다. 체조 선수 시절이라는 핑계가 유려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에 떠오른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아직이구나.
그 착각이 달달했다. 지훈은 사실을 원한 게 아니라,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확신을 샀다. “너만이 날 가질 수 있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집착은 수진에게도 선명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더 세게 품었다. 그녀는 그 뜨거움 속에서 자신이 연기한 몫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계산했다.
두 번째 침대, 두 번째 거짓말
예린은 24살, 대학원생. 그녀는 첫날밤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 인터넷에서 주문한 혈액 모형 팩, 그리고 처녀막 재생 수술 상담까지. 하지만 수술은 포기하고 팩만 남겼다. 밤마다 침대 옆 서랍에 넣어두고,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준혁이 그녀의 귀에 숨을 불어넣었다. “나도 이제 네가 처음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린은 미리 데워 둔 팩을 살그머니 터뜨렸다. 붉은 액체가 흐르자 준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눈빛은 희열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이 여자는 내가 지켜야 할 존재다.
예린은 그 눈빛을 읽었다. 자신이 ‘순결’이라는 이름의 보증수표를 끼고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듯한 이상한 쾌감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잡아두길 원했다. 그래서 거짓말했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피까지 동원한 연기였다.” — 예린의 일기, 2023년 4월 5일
붉은 얼룩 아래
몇 달이 지났다. 수진은 여전히 지훈 옆에 있었다. 토마토젤리의 잔해는 오래전 빨래되어 사라졌지만, 지훈의 눈빛은 여전히 그날의 붉은 얼룩을 품고 있었다. 그 착각이 그녀를 더욱 단단히 묶었다. 때로는 그가 너무 달콤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내가 너를 속인 거라는 걸 알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라는 불쑥스러운 의문이 스쳤다. 하지만 그 질문은 항상 침묵으로 덮였다.
예린의 경우도 비슷했다. 준혁은 그녀를 놓지 못했고, 예린은 그를 조종하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붉은 얼룩이 마르면서 뒤틀리는 건 그녀의 속이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흘린 말 하나로 모든 거짓말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 공포가 예린을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움이 또다시 준혁에게는 ‘순수함’으로 보였다.
선물이라고 말한 기만
순결은 더 이상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건 사회적 통화다. ‘나는 아직 네가 가장 특별하다는 증거’로 작동하는 환영. 속여주는 순간, 상대는 선택받은 존재라는 착각을 한다. 그 착각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렬한 환각을 낳는다.
수진은 어느 날 지훈에게 물었다. “만약 첫날밤에 진짜 피가 안 났다면, 너는 나를 믿었을까?” 지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끝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더 중요해. 그 대답이 진실일까, 회피일까. 수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예린은 준혁에게서 같은 질문을 들었다. “너는 정말 그날이 처음이라고 믿었어?”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중요한 건 네가 믿고 싶어 했다는 거지.” 준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는 뒤틀린 위안이 담겨 있었다.
가장 진짜인 거짓말
몇 해가 흘렀다. 수진과 지훈은 여전히 함께였다. 예린과 준혁도 결혼했다. 첫날밤의 붉은 얼룩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더 단단해졌다. 그 단단함은 거짓말 위에서 자란 나무처럼 오히려 더 튼튼해 보였다.
어느 날, 예린은 준혁에게 털어놓았다. “그날은 연기였어.”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았어. 하지만 네가 나를 위해 연기했다는 게 더 좋았거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다시는 꺼내지 못할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함께 품는 위안이 있었다.
수진은 지훈과의 결혼식 날, 토마토젤리 대신 진짜 장미 한 송이를 시트 위에 놓았다. 붉은 꽃잎이 흩날리자 지훈이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연기야?” 수진은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야.” 그 말이 진실인지, 또 다른 연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들이 서로를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