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줄 서는 거 맞아요?”
와인 글라스가 반짝이는 테이블 끝, 여자가 선다. 붉은 실크 드레스. 한쪽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가슴골에 맺힌 땀 한 방울이 천천히 흐른다. 민재는 그 땀방울이 목덜미를 지나 어느 선까지 흘러갈지를—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 흔적을 따라 손끝이 닿을지—순간적으로 계산한다.
‘작년 가을, 삼성동 코엑스. IT 컨퍼런스 뒷풀이에서…’
생각이 번쩍였다. 그때도 누군가의 눈빛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발가락만 바라보다 잠든 밤. 민재는 그때를 떠올리며 숨을 죽인다.
여자가 고개를 든다. 눈동자가 짙은 와인처럼 흔들린다. 그녀가 웃는다. 아니, 입꼬리만 미묘하게 올라간다. 그 미소가 민재의 배를 찌른다. 와인 한 모금 들이켠 것처럼,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아직 60cm
사람들 사이, 민재는 한 걸음을 뗀다. 붉은 드레스가 살짝 올라가며 무릎 위로 시선이 스친다. 민재는 본 것처럼, 보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그녀 역시 민재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피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60cm.
그 사이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민재의 목뒤를 간질인다. 숨결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 민재는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간다. 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작년 가을, 다시
‘진우, 너도 그랬잖아.’
민재의 머릿속에 동료 진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작년 가을, 서울 삼성동 코엑스. IT 컨퍼런스 뒷풀이장에서 진우는 동료들과 떨어져 칵테일 한 모금 들이켰다. 옆 테이블 여자, 검은 가죽 재킷 안에 브라만 입은 채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을 꽂으려다 떨어뜨렸다. 케이블이 진우의 발끝까지 굴러왔다. 여자가 허리를 숙인다. 재킷 안쪽이 훤히 드러난다. 진우는 굳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자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날 밤, 진우는 집에 돌아와 충전 케이블을 들고 두 시간 동안 베란다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
‘왜 말 한마디 못 했어?’
올해 봄, 부산
‘하린도 그랬지.’
올해 봄, 부산 BEXCO. 브랜드 론칭쇼. 와인 잔 든 사람들 사이, 하린이 서 있었다. 짙은 코발트블루 드레스, 한쪽 어깨만 벗겨진 채. 그녀 옆에 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 여기, 줄 서는 거 맞죠?
— 네, 맞아요. 저도 처음인데… 같이 서요?
그리고 40분 후, 하린은 그 남자와 함께 플로어를 벗어나 로비로 걸어갔다. 남자는 "잠깐 쉬어가요"라고 말했고, 하린은 그를 따라갔다. 로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7분. 서로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남자의 손끝이 하린의 무릎 위로 살짝 다가간다. 하린은 눈을 깜박인다. 그리고 일어선다.
— 나 먼저 들어갈게요.
한마디. 끝.
왜 우리는 이 불길에 손을 넣는가
우리는 모두 그 장면 안에 있다. 행사장에서, 클럽에서, 컨퍼런스 뒷풀이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가능성’이라는 악취를 맡는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얼마나 위태로운가. 한 걸음만 걸어도 끝장이 날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우리는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배웠고, 그걸 망치면 평생 후회한다고 협박당했다. 그러니까 눈 맞은 0.3초, 신호등이 바뀐 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게 되는 거다. 그리고 뒤늦게 생각한다. 내가 먼저 말했으면 어땠을까?
다시, 붉은 드레스 앞으로
민재는 와인 잔을 내려놓는다. 여자는 여전히 테이블 옆에 서 있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민재는 한 걸음을 뗀다. 그리고 멈춘다.
가까워지면 끝나는 거야.
그 생각이 번쩍인다. 하지만 멀어지면 아무 것도 시작 못 해.
민재는 입을 벌린다. 여자는 그 떨림을 보고 있는 듯, 보고 있지 않은 듯. 붉은 드레스 아래, 그녀의 무릎이 살짝 움직인다. 민재의 시야가 좁아진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30cm. 숨결이 직접 닿는다.
민재는 이제 말할 수 없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그 미소가 민재의 가슴을 찌른다. 와인 처럼, 불꽃처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끝난 게 뻔한 이 순간.’
민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여자의 이름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숨결이 닿는 거리, 그 30cm 안에서 민재는 무언가를 결정한다. 한 걸음 더, 아니면 영원히 멀어질까.